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하던 ‘탈핵’이라는 말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장 주변 지역 주민들만의 외로운 ‘반핵운동’은 다양한 계층과 공동체, 도시의 사람들도 참여하는 ‘탈핵운동’으로 변모하고 있다. 원전에 대한 반대뿐 아니라 방사능오염 먹거리의 문제부터,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송전하는 초고압송전탑을 반대하는 운동까지 그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변화와 운동과는 다르게 한국의 원전 중심의 에너지정책 변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후쿠시마 이후 이명박 정부 2년과 박근혜 정부 2년의 시간 동안을 평가하면 한마디로 ‘후쿠시마로부터 배운 게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21기였던 원전은 오히려 3개가 늘어나 24기가 되었다. 이것도 모자라 신규원전을 4기 건설 중이고, 6개를 더 지을 계획이다. 여기에 삼척과 영덕을 새로운 원전부지로 선정해 중장기적인 원전확대 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과 반대로 가는 정부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원전과 관련한 정책공약으로 ‘안전우선주의에 입각한 원전 이용’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원칙을 준수하고 신뢰구축을 최우선으로 하는 책임관리 체계를 구축한다”는 약속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고리1호기, 월성1호기 등 노후원전의 연장운전 허가를 엄격히 제한하고 EU의 스트레스테스트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여론을 수렴하여, 신규원전의 경우도 20년간 전원믹스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추가원전은 다른 에너지원이 확보된다는 전제하에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스스로 약속한 것마저 무시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표결로 날치기 처리한 월성1호기 수명연장 안전성 심의안의 경우 원자력전문가들조차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또 스트레스테스트를 통해 도출한 개선사항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게 노후원전의 수명연장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월성1호기는 적자가 나오는 경제성과 주민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이 수명연장을 반대하고 있다.
신규원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민여론을 수렴하여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그 어떤 수렴과정도 공식적으로 진행된 바 없다. 또한 삼척시민들의 주민투표에서 85%의 주민들이 신규원전부지선정에 반대하는 결과가 나왔음에도 정부는 이러한 결과를 무시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신규원전의 또 다른 부지로 선정된 영덕의 경우 총리까지 방문하여 낙후된 지역사회를 돈으로 매수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것이 과연 국민여론을 수렴하여 원전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인가.
지역을 넘어서는 원자력재앙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원전사고의 피해가 단지 주변 지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원전사고로 인해 수십조에 달하는 경제적 피해 추산이 나오고 있다. 최근 이루어진 건강조사에서 청소년들의 갑상선암 발생이 크게 증가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더 큰 문제는 여전히 수습조차 어려운 후쿠시마 원전부지는 물론 주변 지역이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시마 원전 안에 쌓여 있는 28만 톤의 방사성 오염수에 더해 매일 350톤의 지하수가 흘러들어 오염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오염된 방사성 오염수가 계속해서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지만, 대책 마련은 쉽지가 않다.
원전사고는 발생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 돼서 돌아온다는 것을 후쿠시마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과거처럼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을 돈으로 매수하여 원전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더 이상 문제의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 결국 사고가 나면 우리 모두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종된 민주주의와 핵마피아
문제가 이런데도 원자력발전 중심의 에너지정책이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비민주적인 정책 결정과정과 그 중심에 이른바 ‘핵마피아’라 불리는 거대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5년마다 세워지는 <에너지기본계획>과 2년마다 작성되는 <전력수급계획>, 그리고 각종 원자력발전의 가동과 폐쇄 등 그 어떤 결정과정에도 국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형식적인 공청회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국회 조차 에너지정책의 결정과정에 대부분 배제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국민들이 노후원전 수명연장을, 신규원전 건설을, 초고압송전탑 건설을 반대해도 정부가 강행하면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그것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원전사업자과 산업계 그리고 공무원, 규제기관, 학계,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핵마피아’라 불리는 그들만의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발전’, ‘성장’, ‘안보’ 등등의 논리를 앞세워 원자력발전을 폐쇄적인 방식으로 키워왔고 독점해왔다. 그런 현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높아진 관심 속에 원전비리사태로 극명하게 치부를 드러냈다.
시험성적서 위조뿐 아니라, 금품수수, 위조부품납품, 인사청탁 등 온갖 비리로 200여 명이 기소됐고, 그 중 100여 명이 구속되는 최악의 원전비리사태가 발생했다. 발전사인 한수원은 물론 관련 공기업인 한국전력기술, 한전KPS 등 원전관련 공기업 전·현직 임직원 50여 명이 수상대상에 포함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 왕차관으로 불리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비롯해 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 이종찬 전 한전 부사장, 이청구 한수원 부사장 등이 줄줄이 구속 또는 기소되었다. 원전비리수사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비리의 끝이 어디까지 인지 모를 수사는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아마 한국수력원자력이 사기업이었다면, 이 사회에서 퇴출당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동안 독점해왔던 돈과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중이다. 한수원의 조석 사장은 지식경제부 차관 시절인 2012년 원자력계 행사에 참석해 “월성 1호기 연장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우리 원자력계 일하는 방식 있지 않습니까. 허가 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돈부터 집어넣지 않았습니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에너지정책 결정과정에서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민주적인 구조로 바꾸는 것과 함께 ‘핵마피아’들을 척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밀양송전탑 사태와 월성1호기 수명연장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 이러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이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한 법제도적 개선이 시급한 시점이다.
안전을 무시한 결과 무고한 생명들을 억울한 죽음으로 내몬 세월호 참사가 1년이 다 되어 간다.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유족들을 보면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세월호 특별법이 난항 속에 통과되었지만, 진상조사와 안전을 위한 과제들을 마련할 조사위원회는 언제 가동될 수 있을지 요원한 상태다.
시간이 지나가면 세월호 참사도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사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원전도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이어지고, 어떤 재앙이 언제 눈앞에 펼쳐질지 모른다.
후쿠시마 사고 4주기를 맞는 지금, 그리고 세월호 참사 1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명 끝난 노후원전 월성1호기를 폐쇄시키는 것은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첫 걸음이다. 우리세대와 미래세대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함께 나서주시기를 요청한다.
덧붙임
안재훈 님은 환경운동연합 원전안전특위 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