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본 전래동화집 “햇님달님”은 썩은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던 호랑이가 수수밭에 떨어져 죽는 결말이었다. 튼튼한 동아줄을 잡고 무사히 하늘로 올라가 햇님과 달님이 된 두 오누이의 안위보다 나는 호랑이가 불쌍해 울었다. “하필!” 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 피가 온통 수수를 붉게 물들게 했다는 호랑이가.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동화에서 호랑이는 절대악이었으니까. 아무리 비참한 말로이더라도 왠지 편들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알고 보면 가장 미스테리한 시기
솔직한 독서는 의외로 어렵다. 어른의 세계에서건 어린이의 세계에서건 독서 목록은 무엇보다 은근 내세우기 좋은 자기 교양의 척도이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소위 스펙으로 환산할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저렴한 수단이다. 그러니 책만한 허영도, 책만한 절박함도 없다 하겠다. 더욱이 그것이 시험과 같은 평가를 목적으로 할 때에는, 책이 담고 있는 정보나 책에서 바람직하게 읽어내고자 하는 정답 맞추기에 여념이 없어서, 다소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개개인의 상상력과 소회 따윈 정작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어떤 책이든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의 검증을 요하는 사회에서는 독서란 “정보 창구”이지 “사고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체면치레하는 어른이 되어서보다는 어린 시절의 독서가 훨씬 담백하고 솔직할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 되어 돌아보는 유년은 일종의 실낙원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무겁지 않았으며, 괴롭지도 않았던 듯하다. 모든 게 쉬웠고, 자유로웠다. 그러니 다른 것도 아니고 겨우 책을 펼쳐 읽는 일에 있어서야……. 아뿔싸. 그런데 실상은 그러기가 훨씬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린이 책 비밀의 독서>는 일깨워 주고 있다.
오랜 독자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이 책은 지난 2010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인권오름>에 연재되었던 “어린이 책 읽기모임 공룡트림”의 글을 한데 묶은 것이다.
어린이 책은 무엇일까, 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한 어른들의 어린이 책 읽기 모임은 수년간 국내외 어린이용 도서를 읽고 토론하면서 마치 점점 멀리까지 날아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새들의 비행처럼 분명하고 또렷한 원점회귀를 반복했던 것 같다.
“어린이 책은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일까, 아니면 어린이의 현재 삶을 그리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것일까.”
그러니까 이 기본 질문은, 어린이가 읽는 어린이책인데 왜 그 어린이는 정작 책을 쓰고 읽고 감상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회인가, 라는 반문이라 하겠다.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린이’가 붙으면 미숙하고 보호의 대상이며 올바르게 교육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어른의 사명감 따위로 실은 얕잡아 보고 있었던 속내를 들킨 듯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어른이 만들고 어른이 골라주고 어른이 좋다고 평가하는 책들을 읽으며 자라야 하는 어린이들에게 솔직한 독서란 애초부터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어땠는가. 그래,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은 가장 미스테리한 시기였다. 또렷한 사실의 연속선상에서도 기억은 때론 아직 언어로 분리되지 않은 감정, 상상과 현실, 신화와 역사들로 마구 뒤엉킨다. 그 시절의 나에게도 유행했던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어른들은 절대 모르는 비밀과 사생활이 존재했다. 곳곳이 정글이었다. 깊고, 어둡고, 추웠던 몇몇의 밤들은 그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존재의 단호한 일면이었다. 누가 유년을 밝고 천진무구하고 아름답다고만 하는가. 나부터가 그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왜 나는 나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 어린이들의 어린 시절(현재)마저도 동등한 이해와 소통이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오로지 교육과 주입, 관리 통제가 우선인 시절이라고만 생각하고 마는가. 무슨 권리로 함부로 판단하는가. 어른이라는 권력? 혹은 어른이라는 책임? 대답을 우물거리는 사이 훅 하고 부끄러움이 끼친다.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것도 좋은 책의 역할이지만, 책에 대한 정말 좋은 책은 어디 한번 나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이 그렇다. 세상에 이렇게 많고 다양한 시각의 어린이 책들이 언제 다 나와 있었나 싶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어린이 책들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읽어 본 어린이 책이라고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던 <마당을 나온 암탉>뿐이었는데도, 세간의 찬사와 감동의 홍수 속에서 그대로 휩쓸려 어영부영 넘어갈 뻔했던 새로운 문제의식에 눈뜨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미 본 책인데도 정말 그런가,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을 만큼. 그러니 아직 접해보지 못한 다른 책들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이 책이 어린이책들을 통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은 이 세상 다양한 어린이들이 처해있는 인권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쟁, 장애, 다문화, 성소수자, 환경, 동물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 혹은 한 인간의 내면의 결단이 어떠한 질문들을 통해 형성되는지, 어린이 책이라는 나침반의 파르르한 떨림은 보여주고 있다.
고정된, 그러니까 과녁처럼 딱 맞출 수 있는 정답이란 없다. 밀려오는 질문들에 오로지 부르르 떨며 나아가는 것만이 독서의 유일한 방향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차피 어른들이 읽어낸 결론일 따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책들에 대해 어린이들의 독법은 어땠을까? 책장을 덮으면서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서라도 그 목소리들을 한번 같이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그것이 이 책이 안내하고자 했던 진짜 목적지가 아닐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본 “햇님달님” 이야기에서 나는 요샛말로 하면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것을 생각해냈던 것 같다. 유병언의 시신은 정말 유병언이었을까. 검찰조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마스크를 쓴 최순실은 진짜 최순실이 맞을까. 개연성 있는 추측들과 차마 무시 못 할 증거들에 이내 찜찜한 마음이 스며드는 것처럼, “햇님달님” 속 마지막 호랑이의 죽음은 어린 내게 어딘가 영 마뜩치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 초반, 떡판을 지고 열 고개를 넘어 오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엄마에게 나타난 호랑이는 그야말로 사악했다.
“떡 하나만 주면 안 잡아먹지~”
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란 추호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오누이에게 돌아가려는 엄마의 몸부림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호랑이는 엄마가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나타나 야금야금 그 희망을 파먹는다.
“팔 한 짝만 주면 안 잡아먹지~”
“다리 한 짝만 주면 안 잡아먹지~”
……
……
악의 본성은 압도할만한 힘에 있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을 즐기려는 태도에 있다. 마침내 열 번째 고개에 이르러 엄마의 숨통과 가까스로 버텨내던 희망의 끈을 동시에 끊어버리는 호랑이는, 그러므로 교활했다.
그런데, 그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인 척 오누이에게 나타나는 후반의 호랑이는 어딘가 좀 허술했다. 심지어 코믹하기까지. 오누이의 의심에 목소리를 변조하고 손에 밀가루까지 묻혀가며 엄마인 척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노력하는데, 어린 내가 보더라도 너무나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속임수였다. 초반의 주도면밀한 악의 본성은 어디로 휘발해 버린 걸까. 도리어 오누이의 기지에 농락이나 당하는 호랑이라니! 그러므로 나는 확신했다. 완전히 다른 호랑이임을. 그래서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에서 떨어져 수수밭을 피로 물들이며 죽은 호랑이를 보고는 인과응보의 통쾌는커녕 안타까움과 모종의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얘, 걔 아닌데… 아까 걔 아닌데… ”
그러나 그날의 독서일기엔 아마도 햇님과 달님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거짓 소회가 적혀 들어갔을 것이다. 그 무렵엔 담임선생님 도장이 찍힌 포도알을 어서 하나라도 더 받아내 붙여가야 했고, 무엇보다도 반에서 좀 이상한 아이로 의심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독서의 경험을 한 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웃으며 이 책을 추천한다.
덧붙임
서중원 님은 구술기록노동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