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해외를 혼자 가는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을 알기에 일단 짐을 꾸렸습니다. 어딜 갈 것인지 고민했는데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히말라야, 다른 하나는 영국과 아이슬란드였습니다. 사실 여행이라는 게 뭔가 좀 낭비하는 맛일 텐데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일들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나마 제 로망이 극한적인 어떤 곳들에 가는 것이기에 히말라야를 떠올렸죠. 등반까지는 아니어도 트래킹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알아봤는데 겨울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장비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고 영국과 아이슬란드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영국여행에 부여한 목표는 음악과 관련된 여행하기였습니다. 그냥 관광지만 돌아다니자니 내키지도 않고 영국이라면 평소에 좋아하는 공연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영국여행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이었습니다. 먼저 뮤지컬부터 시작했습니다. 런던의 유명 뮤지컬들은 전부 전용극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원하는 뮤지컬 극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침에 문 열자마자 티켓을 사면 괜찮은 자리를 비싸지 않은 가격에 볼 수 있다는 것은 팁! 그렇게 런던에 있는 내내 뮤지컬을 봤습니다. 특히 ‘레미제라블’은 두 번이나 볼 정도로 재밌게 보고 왔어요. 한국에서 레미제라블 영화가 히트칠 때만 하더라도 ‘세상에 이런 지루한 영화가 있다니’ 싶었지만 우연하게 뮤지컬DVD를 본 이후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머! 이건 꼭 봐야해!’라는 마음으로 매일 티켓 부스 앞을 서성였답니다. 사실 극장 자체는 제가 가본 공연장 중에서 가장 앞뒤 간격이 좁고 옆으로도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봐야하는 구조였습니다. 전날 보았던 뮤지컬 ‘라이온킹’에 비해서도 극장의 규모도 무대장치도 모두 열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역시 바리케이트 너머의 세상을 꿈꾸며 부르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감동은....... 그래서 두 번이나 본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로열 알버트 홀’에서 본 서커스 공연입니다. 사실 포인트는 서커스가 아니라 무슨 공연을 하든 그 공연장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미리 예매까지 했었는데 어이없는 실수를 한 것 입니다. 당연히 저녁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공연장 앞에 도착하니 5시30분! 그런데 이게 웬걸... 티켓을 다시 보니 공연시작은 3시30분이었습니다. 스태프들은 공연을 마치고 퇴장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티켓 창구로 뛰었습니다. Help.... I'm BIG mistake....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며 속으론 ‘망했다... 망했다’만 되뇌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행 중인 저를 무척 부러워한 친구 녀석의 문자가 옵니다. “거긴 오후 6시겠네. 즐겨. 난 잔다.” 차마 답장도 하지 못했습니다. 1시간 남짓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렸더니 아주 여유 있게 등장한 담당자는 나에게 2만원 정도를 추가로 지불하면 저녁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그때 가지고 있던 비상금에 동전까지 탈탈 털고 나니 딱 그 돈이 나오더군요. 그 담당자는 돈을 받으며 퍼펙트라고 하며 친구랑 똑같이 즐기란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 저녁도 굶고 보았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서커스 공연은 공연도 공연장도 사실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공연을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일정을 마치고 아이슬란드로 향했습니다. 마침 친구가 아이슬란드에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아이슬란드라면 누가 가본적도 별로 없을 것 같고 갔다 왔다고 하면 좀 잘난 척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과감히 고른 여행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안일함을 비웃어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시작부터 제 가방이 항공사의 착오로 분실되더니 여행 내내 눈보라가 끊임없이 불어서 고생 제대로 했습니다. 도착하지 못한 가방들 덕분에 빙하 위에서는 청바지에 운동화로 오들오들 떨고 그렇게 좋다는 노천 온천에서도 따가운 우박만 맞았거든요. 아이슬란드가 왜 ICE LAND인지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슬란드를 원망하며 돌아다니다. 친구가 머물고 있는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방문해서는 맥주도 한 잔 마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재미난 이야길 들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아이슬란드는 최저임금도 우리나라 돈으로 약 11000원 정도라고 하더군요. 음식점에서 파는 맥주 한잔에 9천원씩 하면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 하며 메뉴판에 대고 욕을 했었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뒤에 들은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참 기가 막혔습니다. 동양인에 아이슬란드말은 물론 영어도 아직 완전히 원활하지 못한 친구는 그 최저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약 10000원정도 받기로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전에 아르바이트했던 곳에서는 그마저도 임금 체불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학생 비자여서 원래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하는데 허가나기 전에 했던 일에 대해서 은근슬쩍 돈을 안주더랍니다. 가서 깽판이라도 칠까 하며 분노의 맥주를 마셨지만 여행객1인 저와 학생1인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어서 참 씁쓸했던 뒷맛이 남더군요.
이제와 돌아보면 아이슬란드 여행은 영국보다 기대가 컸지만 실상은 지독한 눈보라뿐 이여서 그저 살아남아야겠다는 목표만 되뇌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온 얼음 행성의 촬영지가 아이슬란드였는데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끝이 없는 지평선이 전부 눈으로 덮여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때면 오직 귓가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만이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으니까요. 이런 저에게도 아이슬란드에서 받은 선물이 있다면 마지막날 밤 숙소로 돌아가기 직전 말도 안 되게 구름이 걷히면서 떠오른 초록색 오로라였습니다. 5분 남짓한 시간, 궂은 날씨로 보는 걸 포기하고 있던 오로라가 저에게 굿바이 선물로 살짝 미소를 지어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흐뭇함도 잠시, 다시 폭풍같이 불어온 눈보라 덕분에 사진 하나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여행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기억이 흐릿해 질 때쯤 다시 여행을 떠나면 좋겠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