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한복판, 한 남자가 좁은 인도에 장판을 깔고 무릎에 담요를 덮고 앉아 있다. 이른바 증권맨들의 도시, 엘리트의 도시라 불리는 여의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올해는 겨울이 따뜻하다지만 찬바람에 얼굴과 손이 금세 붉어진다. 이곳은 얼마 전 부당해고된 이남현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 지부장의 농성장이다.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팀 성원들이 미안한 마음을 안고 농성장을 방문했다.
작년 ‘KT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대회 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KT만이 아니라 증권회사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이 얼마나 치졸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증언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올해는 사무금융노동자들이 직장 내 괴롭힘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를 조사하게 되었다. 조사는 연초에 시작했는데 결과보고를 11월에야 하게 돼서 그에게 참 미안했다. 물론 실태조사 결과가 나온다고 괴롭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부당해고가 직장 내 괴롭힘을 알리고 바꾸기 위해서라고 좀 더 빨리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괴롭힘을 발생시키는 성과주의와 노동시간
이번 괴롭힘 조사는 전국사무금융노조의 조합원이 대상이었으며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3만 조합원 중 3,065명 응답하였고 성별무응답, 연령무응답 등을 뺀 3,033명을 분석했다. 심층면접은 11개 사업장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도 KT처럼 기업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괴롭힘이 드러났다. 노조탄압이나 구조조정을 위한 경영전략으로서의 괴롭힘은 비슷했다. 특히 이번 조사결과의 특이점은 3가지이다.
먼저 조직 내 성과주의가 심할수록 괴롭힘이 늘어나고, 근로시간이 길어질수록 괴롭힘을 경험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경쟁 및 성과주의가 증가하였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빈도가 높았다. 경쟁 및 성과주의가 증가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겪는 괴롭힘의 경험 빈도는 변화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의 2배 가까이 됐다. 그리고 괴롭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근무시간이 50시간을 초과해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에서와 같이 ‘과로사와 직장 내 괴롭힘의 연관성’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둘째 괴롭힘의 가해자로 고객이 경영진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임원 및 경영진 4.85%, 상사가 27.23%로 가장 많았으며, ‘고객 또는 거래처’가 6.53%였다. 이는 증권과 보험이라는 고객서비스가 있는 업종의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객에 의한 괴롭힘이 허용하는 기업문화에 대한 제도적 방지책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고객이 불만을 제기하게 하는 불완전판매를 종용하는 기업의 정책이 영향을 미치는지도 더 조사돼야 한다.
셋째 괴롭힘의 원인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이다. 구조조정이나 성과주의가 괴롭힘 경험에 영향을 주었으나 노동자들은 이를 명확히 인식하지는 않았다. 회사의 경영방침이나 성과 위주의 정책이 바뀌어야 괴롭힘이 사라질 것이라고 답하면서도 괴롭힘의 원인을 가해자의 개인적 특성으로 보는 경우가 40%를 넘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아직 괴롭힘을 구조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어에 대한 고민과 괴롭힘을 방지할 제도
함께 조사연구를 했던 사람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란 용어가 적절하냐는 고민을 하고 있다. 고객에 의한 괴롭힘처럼 직장의 위계관계가 괴롭힘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괴롭힘이 직장의 상하관계가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자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편 괴롭힘이라는 말이 너무 괴롭힘 경험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냐는 고민도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괴롭힘이라는 용어는 낯설다. 그래서 괴롭힘이 사람을 자살에까지 이르게 하지만 괴롭힘이라는 용어로는 그 위험성과 심각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도 하게 된다. 몇몇 노동안전단체에서는 ‘가학적 노무관리’, ‘가학적 인사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올해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인 양우권 씨가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결한 사건을 보며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한국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규율할 법 제도가 없다. 소송을 통해 부당노동행위나 산재신청을 인정받기는 하지만 기업은 ‘괴롭혀서 노동자들을 내보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법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직장 내 괴롭힘의 실태를 조사하고 방지책을 고민해야 할 노동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니 정부의 노동정책을 추진하며 오히려 괴롭힘을 심화시키는 데 동조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저성과자 해고는 낙인으로 인한 괴롭힘을 부추길 것으로 보여 우려되기 때문이다. 회사에 득이 안 되는 존재, 팀에 해가 되는 존재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도록 해서 동료들이 ‘저성과자’로 보이는 이를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따돌리고 괴롭힐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노동정책이 어떤가가 직장 내 괴롭힘에 영향을 주는지를 절감하게 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