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후원인 인터뷰

후원인이 전하는 ‘어제의 기억, 내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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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랑방 식구들, 안녕하세요? 저는 강원도 춘천에 사는 선우 영희입니다. 아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어요.
어느 해 여름에 수박을 한 통 사들고 중림동 고갯길을 헤매며 사랑방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사무실 입구에 여러 켤레의 신발이 낯선 손님을 먼저 반겨 주었어요. 정겨운 동네에 정 많고 따듯한 젊은이들이 세 들어 살고 있었지요. 사랑방 첫 인상은 아주 좋았어요. 믿음직했고요. 첫 인상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나 봅니다.
그렇게 알게 인연이 몇 년 안 된 것 같은데 20주년이 된다니, 작은 나무가 무성한 잎을 단 큰 나무가 된 것 같네요. 거름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씨앗을 뿌려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이제 20년생 나무가 되었으니 축하받을 만합니다. 사랑방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이든 사랑하기 위해서, 따듯한 피를 나누고 있는 곳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응원합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길을 먼저 앞장 서 가는 사랑방 식구들이 있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래서 늘 기억합니다! 사람 사는 곳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기운이 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선우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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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記者)는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잘 기록하면 되는 직업이지요. 기자로 15년을 살았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나는 이제 잘 받아쓰지도 못하는구나. 받아쓰는 능력마저 퇴화하면서 자꾸 어제를 돌아보게 됩니다. 어쩌면 저의 기자 인생은 사랑방 활동가들이 불러주는 것을 잘 받아쓰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을 다시 가고, 그들이 만난 이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기획한 자리에 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사가 나왔고, 저는 배웠고, 세상은 바뀌었다, 고 문장을 끝내면 좋겠지만 마지막 쉼표 사이의 문장은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잘 받아썼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세상을 불러준 이들의 이름은 이창조, 김정아, 배경내, 류은숙, 미류, 명숙, 훈창... 쉼표 사이에 깜빡한 이름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미류 활동가에게 고백한 적이 있지만,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섣부른 절망에 젖었던 1990년대 중반, 새로 시작하는 인권운동이 없었다면 그들의 운동에 힘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저는 20년을 축하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세상에 대한 섣부른 실망이 들 때면, 그런 생각을 하며 견딥니다.
가끔씩 헛갈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랑방 성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물론 모든 생각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닮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과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5년에 한번씩 사랑방 공간을 찾아갔지만,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었던 이들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가 들리는 시간에 글을 써서인지 감상이 좀 지나치군요. 그래도 끝으로 꼭 인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방에서 오는 메일에서 그의 이름을 볼 때마다 다행이다, 생각합니다. 최은아 활동가님, 감사합니다.
<한겨레21> 기자 신윤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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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이 문을 열던 무렵의 공기는 스산했습니다. 정태춘 선생이 부른 <1992년 장마, 종로에서>의 허전함은 그해 겨울 치러진 대통령선거 이후 절정에 달했지요. 절망이 사람의 온기마저 갉아먹던 시절 사랑방은 인권의 보루이자 희망으로 등장했습니다. 저는 그 시절 사회부 기자였기에 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하루소식’의 애독자였습니다. 언론이 외면하고 왜곡한 현장의 목소리가 하루소식엔 여과 없이 담겼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따금씩 글씨가 뭉개진 채 팩스로 들어오던 하루소식의 강렬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로 일할 때 만들었던 노보와 인권위 공무원이 되어 도안한 보도자료에 하루소식의 형식과 문체를 허가 없이 표절한 사실을 이제야 이실직고합니다. 사랑방의 스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심의 결기를 되돌아보며 현실의 엄중함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길 기대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육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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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 이제 성년이다. 우선 축하와 갈채를 보낸다.
인권이 무엇인가? 하늘이 준, 선천적으로 지닌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기본적 권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독재정권 치하에서 무시되고 유린되고 잊어버리고 지내오지 않았나. 이때, 1993년 서준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자그마한 모임이 인권을 찾자고 들고 일어나 “인권운동사랑방”이라 이름 지었지. 태어나자마자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에 도전하였지.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찾아 증언을 공개하고, 국가보안법 판례집을 발간하고,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조작사건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인권하루소식”을 발간하여 기존의 신문들이 외면하는 인권유린사태를 세상에 전파했지. 바로 이어 1994년엔 동티모르(당시 인도네시아에 속함)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아르헨티나의 의문사규명 단체인 “5월광장 어머니회”와 손잡고 국제적으로 연대했지.
1996년,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히는데 바로 무료 “인권영화제”개최야. 국제적으로 문제되는 인권에 관한 영화를 수집하여 수백에서 수천만 원이 드는 영화제를 17회나 이어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 연이어 주류가 외면하는 부랑인, 철거민, 재소자, 보안관찰자, 비정규직노동자 등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찾아 주기 위해 동분서주 투쟁한 역사 - 20년이야. 불과 10명도 안되는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이 생계수단이 아니라 생활자체라는 신념을 가지고 피.눈물나게 살아온 나이테지. 아하! 장하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좋다.
인권이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좋고, 활동가들의 투명하고 순수한 삶이 좋고, 사랑방이란 이름이 좋다. 시골출신으로 사랑방의 기능과 분위기를 알기 때문이다. 사랑방은 시골사람들의 만남, 대화, 쉼터, 놀이, 나눠먹음의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사랑방이 명륜동에 있을 때부터 인권하루소식지를 받아 보고 일희일비하였으니 사랑방과 함께 나이를 먹고 머리가 하얘졌다.
적은 인원이 대단히 크고 많은 일을 해내는데 놀랍고, 그에 반해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데 놀랍고 부끄러울 뿐이다. 앞으로 20년, 200년 우리 모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한다. 아니, 이런 활동이 필요 없어야겠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구약 욥기 8장 7절)”
사랑방 지지자 손 영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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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인권은 불편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말을 적용되기 쉽지 않다. 불편함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준공한 성산도 인권센터 사람 엘리베이터도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아내가 하고 있는 장애인 인권운동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권은 좀 불편함을 감수함에도 가야 할 사회적 가치다. 세상에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감수하자고 이야기 해온 곳이 인권운동사랑방이다. 1993년은 우리 사회 권위주의 체제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던 인권이 척박하던 시절 사랑방은 기존의 기득권과 무지에 인권의 소중함 인권적 가치가 사람의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지 길을 열어온 곳이다. 그런 사랑방을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지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앞으로 사랑방 20년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의 가치가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있도록 인권적 가치가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 사랑방이 큰 기여를 하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인권중심의 세상이다. 그 길에 사랑방이 선도자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 길에 작은 역할이나 친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겠다. 사랑방 20년을 축하한다. 사랑방의 친구이길 바라는 사람이 몇 자 적는다.
인권적 사회를 지향하고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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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를 따라 인권영화제의 영화들을 보면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하는 따스한 온기와 뜨거운 열기가 좋아 가끔씩 기웃거리는, 오십 대 전업주부 담은입니다. 사랑방이 스무 살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의미가 묵직하게 가슴에 안겨 오는 만큼이나 또 묵직하게, 부끄러움 역시 느껴졌습니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의 날이 무디어진 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도 사랑방엔 늘 불이 켜져 있었네요.
살아가는 상황들은 쉽사리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요즘이 어느 때인데, 하며 탄식하게 되는 일들은 사라질 줄 모르고 여전히 반복되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하지만 그만한 일들로 희망줄을 놓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쓸쓸함을 함께 공유할 마음들이 주위에 아주 많아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무엇 무엇이 어떻게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고는 꿈꾸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예민하나 저것에는 둔감할 수 있음 또한 알게 되었고, 진보라 불리던 것이 진부함의 옷으로 갈아입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 역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에 감히 요청을 드립니다. 무뎌지는 우리 마음들이 이것에도 예민하고 저것에도 예민해질 수 있도록 인권에 대한 감수성의 날을 계속해서 벼려 주시기를. 그래서 쓸쓸함에 지쳐 냉담해지지 않고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보듬을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우리가 아주 조금씩 진화되어 가기를 말이지요.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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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의 많은 부분이 노동자의 죽음과 질병을 대면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 공장 문 앞에서 인권은 사라진다”라는 것이 가장 선명하고 강렬한 인권에 대한 알아차림이었다.
그 강렬함으로 때때론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것들이 많기도 했다. 모든 인간(인간의 넘어선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의 전 과정에 인권의 문제를 깨닫고, 나누고, 실천하는 일은 녹녹치 않은 일이다. 이런 나에게 사랑방은 놓쳐버린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고, 마음 한켠에 늘 함께 동행하고 싶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물리적인 거리가 멀다보니 마음으로만 일 때가 많다는 것이 아쉽지만...
20년 동안 인권운동 사랑방과 씨줄날줄처럼 얽혀있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인권운동사랑방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군요.
인권운동사랑방이 20년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디선가 읽고 남겨두었던 글귀가 떠오릅니다. “인간은 승산이 있을 때만 저항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승산없는 저항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것도 아니다. 저항이 목적이고 이 저항을 통해 스스로를 인간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그 저항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리고 종국엔 그러한 저항을 거쳐야만 진정한 승산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애당초 승산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선하고 발랄하고 진정성 있는 저항을 해온 사랑방의 기억이 미래에도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창 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상임활동가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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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만든 인권하루소식으로, 쫓기면서도 끝내는 스크린을 세웠던 인권영화제로, 이 땅에 인권의 개념도 희미하던 시절에 인권을 각인시켰던 사랑방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기어코 성사시키기 위하여 눈이 평펑 내리던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 비닐아래에서 추위에 벌벌 떨던 사랑방이었습니다.
평택, 용산에서부터 지금의 쌍차까지 생존의, 투쟁의 현장에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방이 있기에 인권은 이제 없는 자의 인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할 사랑방이.
우쨌든 용산 장례식장에서 같이 지냈던 사랑방 친구들이 좋아서 더 좋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용산 모기장 왕자,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 이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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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창립 20주년을 축하해요. 사랑방과 인연을 맺은 게 10여년이 되네요. 사랑방은 아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요. 소수자들의 인권과 소외받는 자들, 힘없는 노동자들,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이 당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는 사랑방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사랑방의 아랫목이 되어주길 바랄게요. 다시금 20세 생일을 축하해요.
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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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에서 시민다움으로
인권이라는 말은 요즘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말 중 하나가 됐습니다. 신문 방송에서, 인터넷에서, 거리에서도 인권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인권을 함부로,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그런 만큼 이제 인권은 특별히 운동의 목표가 되거나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인권의 가장 강력하고 든든한 벗이 되어야 할 이들이 인권을 가장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어떤 진보적 좌파 운동가들에게 인권은, 필요하긴 하지만 사소한 문제처럼 여겨지지 않을까요? 또한 최첨단의 좌파 정치철학과 이론들을 섭렵한 어떤 이들은 인권을 지배 계급의 수사학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가나 이론가들이 어떤 점에서는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권은 많은 경우 희생자의 권리, 곧 강한 이들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이들의 권리, 그러한 보호 아래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이들의 권리로 여겨지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보호의 권리로 인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이제 인권은 조금 더 적극적인 권리, 적극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다움의 권리로서의 인권이, 시민다움의 권리로, 여성다움의 권리로, 민중다움의 권리로 확장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인권운동사랑방이 앞으로도 그 일에 앞장 서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 곁에 함께 하겠습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진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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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써 먼저 부끄러운 마음을 갖습니다. 기독인들이 인권 문제만은 제일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을 멀리서나마 미력하게 지지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도 결국은 인권회복입니다. 한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권유린은 가장 큰 죄악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인권은 이 세상 어떤 가치보다 중요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인권 현상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활동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져봅니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불의와 맞서 싸워주시기 바랍니다. 힘껏 돕겠습니다.
부림교회 백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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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6년에 처음으로 인권운동사랑방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문화예술분야 '표현의 자유'를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권영화제가 계기였습니다.
서울역에서 숙대입구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사무실, 혜화동 로타리 근처 사무실 등에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던 나날들! 자체 발전기를 돌려야 했을 정도였던 방해공작, 1997년 서준식 당시 집행위원장 구속 등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여러 반민주적인 장애물들을 정면으로 돌파해온 사랑방의 활동가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수고에 대해 고맙다 말씀드리자니 실은 염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권운동사랑방이 저의 인권의식을 지키는 '푯대'이자 '깃발'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늘 감사드리며, 함께 하겠습니다.
영화활동가 김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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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랑방의 풋내기 후원회원입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사랑방은 현장과 사람을 지향하는 곳인 것 같습니다.
큰 흐름과 현장의 이야기를 잘 해석해주는 곳.
그래서 저에게 사랑방 활동가들이 함께 쓴 '수신확인'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 드러내는 일에 늘 사랑방이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고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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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을 처음 만난 건 1995년경이었던 같다. 당시 내가 일하던 구로노동자문학회는 여러 민주단체들과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무실 팩스로 <인권하루소식>이 배달되어 왔다. 물론 ‘인권’이라는 말은 낯설고 생소했다. 은연중에 ‘개량’을 떠올리거나, 계급투쟁이나 혁명운동의 어떤 전선에서 조금은 멀어진 부차적인 운동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재하의 애매모호한 보편적 인권이 아니라 더 집중적인 계급적 당파성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설프게 배운 사회과학이라는 게 그렇게 엉성하고, 섣부르고 건방졌다. 그러다 1998년 경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잡지를 만들 당시 <인권영화제>를 준비 중이던 류은숙 동지를 취재하며 사랑방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각종 교육 자료들을 보며 구체적으로 사랑방을 만나게 되었다. 자꾸 속화되어가는 노동운동이 사랑방만큼 열려 있거나, 전면적이거나, 치열하거나, 예민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사랑방의 보이지 않는 회원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나중엔 대추리나, 기륭, 용산, 희망버스 등지에서 래군, 명숙, 미류, 일숙, 정록, 민선, 훈창 등 사랑방 동지들과 구체적으로 함께 일을 하며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그렇게 우리 사회 대부분의 억압과 차별, 폭력이 있는 곳이면 늘 함께 해왔던 사랑방의 20년. 그 진정한 결들이 우리 사회의 속살 어느 깊은 곳에 아름다운 삶의 무늬로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믿어보며, 앞으로 다시 가는 길 내내도 우리 모두의 진실의 파수대로, 저 깊은 심연으로 사랑방이 있어주기를 바래본다.
시인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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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은 제게도 고향 같은 곳입니다. 20년 전에는 공간을 같이 썼구요, 10여 년 전에는 같이 열심히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운동도 했습니다. 제2회 인권영화제 때인가요? 저도 자막 번역 작업에 함께 했어요.^^ 서준식 선생님과 기자회견 이후 같이 술 한 잔 하던 기억도 새롭네요. 팩스뉴스에 어떤 기사가 실릴까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지요. 사랑방은 우리 인권운동의 '사랑방'이었습니다. 사랑방이 커지면 사랑채가 되고 아흔아홉 칸 '큰집'도 되는 게 세상사인데 사랑방은 언제나 사랑방인 게 좋습니다. 한강, 낙동강도 작은 연못에서 시작하잖아요. 누구나 사람답게 사는 인권세상에서 언제나 마르지 않는 검룡소, 황지연못이 되어주세요.
누구나 집, 땅, 마을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법학적으로 논증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으며 매일 막걸리를 혼자 마시는 이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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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제주에서 얄리가 응원합니다...
벌써 20주년이네요... 사랑방 자원활동 모임을 하며 10주년 행사 준비를 도왔던 게 새삼스럽게 생각도 나고... 벌써 10년이 지났나 싶은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것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지난 10년은 제주에서 살다 보니 사랑방 사무실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네요.. 사무실 한 번 가보지 못했어도... 특별하게 만날 약속을 정하지 않았어도... 문득 참여하게 되는 집회 장소에서... 마주치는 활동가들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방을 늘 애정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사랑방의 다음 10년에 대해서 꿈을 꾸어 봅니다... 그 때에는 지금 보다 더 희망적일 거라 믿습니다...
20주년... 생일 축하 합니다. ~~~~~
제주에서 꿈꾸는 사람들... 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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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권의 현장’에서 사랑방 활동가들을 만나면 늘 든든합니다. 물대포가 몰아치는 희망버스에서, 폐허가 된 용산에서, 화장실에 숨어 점거택을 짜던 서울시 의회에서.. 외롭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사랑방 활동가들은 늘 든든한 동지이자, 선배이자, 친구가 되어주었지요. 그래서 사랑방 20주년이 진심으로 고맙고, 앞으로 20년도 지금처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랑해요. 사랑방~^^
공감에서 사랑방을 만난 장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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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의 활동을 보고 있으면 '최전선'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물론 한국 사회운동의 전선이 단일하지 않은 만큼 사랑방이 모든 운동의 최전선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인권운동 내에서도 사랑방이 가장 급진적이라거나 치열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방이 최전선에 서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권과 운동에 대한 그 고민의 근본성과 활동의 강렬함 때문입니다. 지난 20년간 인권의 원칙을 구현하려는 운동의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온 사랑방, 바로 사랑방이 지켜온 그 자리가 제게는 최전선으로 다가옵니다. 사랑방 활동의 스무해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어쩌다 인권활동가들과 놀다가 요즘 인권 공부를 하고 있는 수유너머N의 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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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싸움에 2년째 묶여 있는 나는 지금 스스로를 활동가로 규정하고 있다. 세상에나, 이런 겁쟁이가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르다니. 가망 없어 보이고, 언제나 패배하기만 하는 싸움들에, 자본과 공권력, 제도권 정치의 높은 벽 앞에서 발 동동 구르는 일이 기실 전부일지도 모를 일들에 헌신하는 활동가는 대개 특별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저질 의지’의 인간도 활동가연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건 좋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본’을 보면서 서서히 체득해간 어떤 삶의 방식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내가 인권운동사랑방의 벗들을 만나 사귄 과정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개굴과 그의 친구들을 밀양으로 초대하여 인권교육 강좌를 한 것이 사랑방과의 만남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몇 번 사랑방 사무실에서 함께 마시며 놀던 기억이 특별히 행복했던 나로서는 이들과 사귀면서 당시 내가 겪고 있던 학교 안팎의 어려운 싸움들로 얻게 된 심적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씩씩하게 싸우고, 골똘하게 일하고, 또 유쾌하게 놀 줄도 아는 사랑방의 친구들을 보면서 부질없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겨우 한 달에 후원 조금 한 게 전부인데, 사랑방의 벗들은 나에게 너무 큰 도움을 주었다. 작년 1월 16일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자결하셨을 때, 그 이후의 투쟁 상황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갑갑하던 나는 제일 먼저 ‘장의사’ 박래군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학교에서 일제고사 싸움으로 지쳐있을 때 한밤중에 날아드는 알콜성 메시지로 나를 격려해 준 친구는 개굴이었다.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해 뭔가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할 일이 있을 때 나는 한낱의 글을 찾아 읽게 되고, 밀양송전탑 싸움에서 뭔가 법률적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내가 떠올리는 이는 변호사가 아닌 류은숙 선생이다. 지역에서 영화제를 해야겠다 싶거나 뭔가 영화적인 소스가 필요할 때 떠오르는 이는 일숙이고, 실제로 나는 인권영화제의 VHS 테잎으로 학교 아이들을 적잖이 빨갛게 물들이거나, 흑색을 덮어씌우기도 하였다. 사랑방에서 만난 밀양 친구 명수와 그의 아내 혜영의 이름으로 내건 현수막은 지금도 밀양시내에서 관변단체들의 현수막 한가운데서 나부끼고 있으며, 이역만리 브라질에서는 괭이눈이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밀양 송전탑 싸움에서 내용적으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인권침해 조사단 보고서’인데, 그 보고서는 민선을 비롯한 한 무리의 인권활동가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미류는 강정에서 활동하던 밴드와 함께, 밀양으로 와서 노래란 트로트, 가수란 나훈아 송대관 밖에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국적불명의 노래로써 문화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고작 한 달에 1만원 후원금 내고 지금껏 그들에게서 받은 은사의 목록을 나열하자니 끝이 없다. 그런 사랑방이 이제 겨우 성년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그럼, 그동안 내가 알던 사랑방은 10대 ‘고삐리’였다는 건가? 살짝 속은 기분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이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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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데 먹을거리 입을거리 잠잘거리가 있으면 된다. 거기다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삶이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선 모두 안 된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럭저럭 산다. 아니 그들도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다. 돈을 끝없이 벌려는 마음에 불행하다.
누군가 그랬다. 인권활동가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인권운동사랑방’ 일꾼들은 늘 낮은 사람들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난 다달이 돈을 내며 함께 할 뿐이라 죄송한 마음이다. 나도 책방 풀무질을 스무 해 째 꾸리고 있다. 이 땅에 인권 생태 평화 나눔이라는 말이 운동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꿈꾼다. 그 길에 사랑방과 풀무질이 함께 걸어서 참 기쁘다.
2013년 9월 3일 수요일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