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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두서없는 불혹의 이야기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지만, 어쩌다보니 아무튼 올해 저도 불혹이란 나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나이 따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렇게 쓰고 나니 뭔가 엄청 나이가 많게 느껴지네요. 흐흐흐 >.< 생각해보면, 저의 부모님이 이 나이였을 때는 제가 벌써 중학생이었습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친구들과 이리저리 정신없이 몰려다니던 시절이었죠. 당시의 부모님은 3남매를 키우면서 얼마만큼의 책임감과 불안함을 견디셨을지 참... 새삼스레 머쓱해집니다.

사실 저는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사는 것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긴 합니다. 학교 다녀올 시간에 회사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뭐.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나 스스로에서 시작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에는 저기 멀리 있을 뿐 나와 전혀 관계없었던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납니다. 게다가 그 일들이 그냥 일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에게 일정한 책임을 물어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나옴직한 일들이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내가 그 책임을 떠안아야 할 일들이 생긴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여차저차해서 아는 형을 어느 정도 돌보게 되었습니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형이 많이 아프고, 가족들이나 주변의 도움을 받을 곳도 없는 상황에서, 한 번씩 병원에 다녀오고, 재정계획을 같이 세우고, 주변 사람들을 조율하고, 만일의 경우에 어떻게 할지를 얘기합니다. 뭐,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의 끄트머리에 어느 정도 개입해서 같이 정리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마음에 짐이 되기는 합니다. 원래 남의 삶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 제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인권운동사랑방에서도 참으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두에게 정말 죄송하고 활동가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사실 이런 난망한 사건이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설마설마 제가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는 보수세력의 황당함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일도, 이제는 강 건너 불 보듯 쯧쯧 혀만 차고 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떤 사건인지 공부를 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을 하고, 대응을 위한 활동을 준비합니다. 그 일들이 그저 TV 속의 뉴스가 아니고 나의 삶에 닿아있기 때문이고, 나에게 어떤 책임을 묻기 때문입니다. 설마가 사람을 잡도록 내버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각 나이대마다 약관이니 불혹이니 이름을 붙였던 공자 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죠. 뭔가 어렵고 힘든 일들이 생길수록 나부터, 사랑방부터 다시 돌아보고 챙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야 워낙 천방치축이라 이제야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이런 일들보다 훨씬 더 어렵고 큰일들을 책임지고 헤쳐 나가는 모든 분들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나 한번 드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