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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재난을 묻다-참사를 곱씹다

* 세월호 참사의 '구조적 책임을 물을 구체적 방안'을 탐구하며, 진실을 밝히는 길에 함께 하기 위해 지난 3월 시작한 <노란리본 인권모임>. 참사의 구조적인 책임과 인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공부하기 위해 책을 읽고 세미나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인권의 대전환>에 이어 두 번째로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이 쓴 <재난을 묻다>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일곱 개의 참사를 되짚어보며 참사의 사회적/국가적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 여러 번의 참사를 겪으면서도 달라지지 않은 문제점과 참사를 만드는 구조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세미나를 위해 나눠 맡았던 발제 중 1999년 발생한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화재참사'에 대한 글을 나눕니다.

익숙한 슬픔과 변주되는 피해

'참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롭지 않다. 10명 이상이 사망한 '대형재난'은 지난 50년간 두 달에 한 번 빈도로 일어났고, 피해자 수가 10명 미만인 참사까지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수많은 죽음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모든 참사는 충격적이고 슬프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똑같은 무능함들 또한 반복된다. 그래서 참사 이후의 헛발질로 가득한 사후조치와 무례하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 또한, 화가 날지언정 새롭지는 않다. 반복되는 익숙한 슬픔과 변주되는 피해의 레퍼토리는,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롭지 않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23명이 사망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에는 화재가 일어난 당일 유치원생과 미술학원생, 초등학생과 인솔교사 등 500여명이 묵고 있었다. 화재가 일어난 방에는 유치원생들만이 자고 있었고, 가장 많은 사망자(18명)가 있었다. 불길이 일어나고 번지던 시간에 인솔교사들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건물에서 떨어진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목격 증언들이 있었다.

참사의 시작 – 이윤의 추구, 미뤄진 안전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은 참사 발생 1년 전인 1998년 2월에 화성군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같은 해 12월에 완공 후 운영되었다. 소유주는 이전에 같은 지역에서 무허가로 롤러코스터나 수련시설 등을 운영하다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화성군수의 선거자금을 제공해서 얻은 친분이나 다른 친목 모임 등을 이용해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건축 및 운영 인허가를 받았다는 정황이 있다.
또한 건물을 증축하는 과정에서도 컨테이너 박스를 쌓은 뒤 지붕을 덮고 외벽을 나무로 마감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서 7억 3000만원의 예상 건축 소요비를 7000만원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화재가 번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벽의 목재와 컨테이너 박스의 스티로폼, 비닐 장판 등 건물에 가득했던 인화물질들은 화재 당시 순식간에 타올랐다.
'안전'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태도 역시 우리에게 익숙하다. 대구 지하철 참사(2003. 02. 18) 이후에서야 사람들은 지하철이 인화성 물질 및 화재시 유독물질을 내뿜는 소재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해외로 수출하는 전동차가 10~15억 사이었던 반면 국내 지하철은 도입 단가가 5,6억 정도였다고 한다.
여수 산업단지 대림산업 폭발사고(2013. 03. 14)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년에 한 번씩 거대한 산업단지의 공장 설비 대부분을 정비, 보수하는 '대규모 정기 보수'로 인해 공장 가동을 멈추면, 누군가는 그렇게 멈춘 시간을 '손해비용'으로 계산한다. 그렇기에 정비 전 설비에 남아있는 위험한 화학물질을 제대로 청소해내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야간작업이라도 불사하며 손해비용을 줄이려 한다. 그렇게 줄어든 기업 손해비용의 대가는 누군가의 '안전'이었다. 여수 산업단지는 45년간 폭발 및 화학물질 누출 사고 215건, 사고 사망 122명, 부상 211명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도 같은 모양새를 봤다. 허용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과적, 승선 인원의 번복, 기상상황을 무시한 출항, 노후했지만 교체되지 않은 장비. 계산기를 두드리는 누군가는 "사고는 확률"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안전'은 누군가의 이윤을 위한 도박의 칩이 되어 노름판 위에 오른다. 노름에 지면,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참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참사의 발생 – 어떤 인재(人災)인가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화재는 숙박동 3층의 한 방에서 시작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화재 발생 이틀만에 발화 원인을 "모기향 불이 옮겨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다. 발화 원인을 밝혀내려면 최소한 2~3개월은 걸린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던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화성군과 경기도는 곧바로 화재의 원인을 모기향 불로 단정지었다. 자연스럽게 이후 재판 과정에서 수련원장과 화성군청 관계자, 건축설계업자 등이 처벌을 받기는 했으나, 가장 큰 책임은 당시 모기향을 붙인 유치원 원장에게 지워졌다. 유치원 원장을 포함한 인솔교사들은 사건 당시 현장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모기향의 불이 옮겨붙어서 화재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이 이후 여러 번의 모의실험에서 증명되었고, 화재 당시 누전차단기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한전 직원의 증언도 있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이 들어선 후 근방의 전력수급이 부족해졌다고 하고 이전에도 두 차례 전기누전으로 인한 작은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화재가 있었던 방은 건물의 모든 전선이 가장 먼저 통과하는 지점이었다고도 한다. 이상할 정도로 신속한 국과수의 조사결과 발표, 기다렸다는 듯이 그 결과를 바탕으로 수사를 이어나간 조사기관들. 이 과정에서 부실한 건물 공사나 소방 시설의 미흡 등은 잘 이야기되지 않았다.
모든 참사에 대해서 '예견된 인재'라는 말을 많이 붙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人에 의한 재난일까. 모기향 불을 붙인 유치원 원장, 화재가 발생한 역에 아무것도 모른 채 진입해서 전동차의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탈출한 기관사, 위험한 화학물질이 아직 잔류해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용접 작업을 위해 불을 붙인 노동자의 안전 불감증을 원인으로 지목할 때에는 화재에 취약한 건물 설립과정, 불쏘시개나 다름없는 재질의 전동차, 위험한 화학 물질을 제대로 청소하지 않은 원청 기업에 대해 이야기할 틈이 없어진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에 정말로 가만히 있었던 배의 승객들의 안전 불감증이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한 해법은 '안전교육'과 '수영교육'이 아니다. 구조적 위험은 개개인이 조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우리는 개인人의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위험을 만들어내는 '위험 생산자'들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참사의 이후 – 존엄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씨랜드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슬픔과 모욕의 38일'을 보내야 했다. 혼선을 빚는 경찰 수사, 말을 바꾸는 국과수.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찾아간 국과수와 화성경찰서에서는 경찰들이 벽을 세우고 유가족을 맞았다. "변호사만 자료 열람이 가능하다"는 화성경찰서 수사과장의 말에 유가족들은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변호사 역시 자료의 1/5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7월 23일에는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했지만 버스채로 견인당하기도 했다. 유가족들을 향해 쏟아진 모욕적인 발언들 또한 있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게 된 사건의 수사 과정에 참여할 수도,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미적거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또한 우리에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쏟아졌던 수많은 의혹의 눈길과 비난의 목소리, 손가락질들은 씨랜드 참사 당시와, 아니, 너무나 많은 참사 사건들과 유사하다. 씨랜드 참사 이후, 유가족 중 한 명은 전 국가대표로써 본인이 받았던 훈장들을 모두 반납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참사 이후 남은 사람들을 대하는 국가와 사회의 태도에서 존엄이 무너지는 과정을 본다. 충분한 애도와 남은 이들의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참사를 서둘러 잊어버려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추모 공원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설립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는 명칭에도, 그 내용에도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세월호 추모공원과 마찬가지로 '혐오 시설'이라는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사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 모두, 이윤을 이유로, 혹은 불편함을 이유로 사회에서 밀쳐지고, 그리고 잊혀진다. 존엄은 이렇게 무너진다.

참사의 기억 – 두 개의 백서

씨랜드 참사 이후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개의 백서가 출간된다. 경기도에서 출간한 <씨랜드 청소년 수련의집 화재사고 백서>(경기도 백서)와 유가족들이 모인 유족회에서 출간한 <씨랜드 참사 백서 – 그 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유족회 백서) 이다. '경기도 백서'는 주로 사건 수습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며, 백서의 집필과 발간 사실이 유가족들에게 알려지거나 완성된 백서가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다음 해 발간된 '유족회 백서'에는 사건 발생부터 재판 과정까지 유가족들이 가진 여러 의혹과 의문점이 담겨 있다.
두 개의 백서는 참사를 기억하는 두 가지 방향을 보여준다. 경기도 백서는 참사 이후의 '원만하고 빠른 수습과정'을 위주로 집필되었다. 그렇기에 경기도 백서에는 참사에 대한 애도와 기억이 담겨있지 않다. 유가족들은 그저 '과격한 집단 민원인'이자 '보상문제의 대상'일 뿐이다.
과거의 많은 참사 이후 참사를 담당했던 기관에서는 백서를 출간해왔다. 그러나 그 백서들이 하나같이 부실한 대응, 지휘체계 혼선, 개선되지 않은 문제점과 페이퍼 대책 남발 등에 대해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 참사들을 반복해서 마주본다. 과거의 참사들에서, 그리고 발간된 백서들에서 단 한 가지의 교훈만이라도 얻었더라면 다른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까.
유족회 백서는 원만하거나 빠르게 사건을 수습하려 하지 않는다. 의문점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하고, 섣불리 '사건을 종결'시키지 않는다. 모든 질문의 해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다시 한 번 질문한다. 그렇게 참사를 기억한다. 2000년 7월, 유족회의 보상금 일부와 변호인단의 수임료 일부를 모아 한국 어린이 안전재단을 창설했다. 재단에서는 화재 예방 교육과 어린이 카시트 보급 등의 사업을 해오고 있다. 그렇게 참사를 기억한다.
매년 6월 30일에 한국 어린이 안전재단에서는 씨랜드 화재참사 추모식을 갖는다. 서울 어린이안전교육관에는 씨랜드 화재참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추모식에는 참사의 생존자 또한 참여한다. 생존자는 지금도 진상규명에 대해 얘기한다. 전문가들 또한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한 검증 결과와 다양한 이견을 백서 등에 온전히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원만하고 빠른 수습'이 아닌, 그래서 빠르게 잊어버려야 하는 무언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먼지 쌓인 행정서류 중 하나인 백서가 아니라, 온전히 참사를 애도하고 기억해내는 백서 또한 그 다른 방식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함께 읽어요~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나온 책 <재난을 묻다>는 남영호 침몰참사(1970),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의집 화재참사(1999), 대구지하철 화재참사(2003), 춘천봉사활동 산사태참사(2011), 여수국가산단 대림산업 폭발참사(2013), 태안해병대(2013), 장성효사랑요양병원 화재참사(2014)를 되짚으며 재난참사의 공모자였던 국가에 대해 질문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