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뮌’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들어본 건 아마 고등학교 역사시간이었던 듯 하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급진주의자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잠깐 세웠던 것이 ‘파리 꼬뮌’이라고 배웠고, 이상한 발음 때문에 기억에 남았을 뿐 별다른 관심은 갖지 않았다.
이후 대학 시절, 80년 광주에선 정부 없이도 질서가 유지되었고 심지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도왔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이상한 느낌이란! 운좋게도 중학 시절 자치적인 학급 운영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그게 이상주의자들의 헛소리로 들리지 않았고, 그런 민중의 자치적인 공동체를 두고 ‘꼬뮌’이라 한다는 걸 얼핏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꼬뮌은 가능하며 실재했었다는 믿음이 내가 진보적인 지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지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5월 25일 새벽, 처음으로 거리에 진출한 촛불 시위대에게서 나는 ‘꼬뮌 같은 어떤 것’을 목격했다고 믿는다.
교보문고 앞 도로에서 경찰과 끈질기게 대치했던 약 500명 정도의 시위대는, 새벽 2시경 경찰이 해산을 포기하고 물러가자 그 자리에 모여앉아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그리고 새벽 4시경 어청수 경찰청장의 직접 지휘 아래 경찰의 폭력 진압이 시작되자, 믿을 수 없는 용기와 끈기를 보여주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경찰에 맞섰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경찰에 맞서는 용기도, 물과 김밥을 사 와서 서로에게 돌리던 우애도 아니었다.
시위대가 노상에서 소형 앰프와 마이크로 자유발언을 하던 당시, 허름한 츄리닝 차림의 한 남성이 술에 취해 위협적인 소리를 지르며 시위대에게 다가왔다. 한 사람이 나서서 그 사람을 다독이며 한쪽으로 데려갔지만, 그는 결국 다시 다가와 마이크를 청했다. 이 때 나는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마이크를 안주거나, 그를 쫓아내거나... 혹은 술취한 그 사람이 마이크를 독점한 채 소위 ‘깽판’을 놓거나 할까봐.
사람들은 마이크를 내주었고, 마이크를 받은 그는 ‘나도 박정희 시절 탄압받았다’는 요지의 잘 정리되지 않는 억울함을 풀어놓았다. 사람들은 담담히 들어주었고, 적절한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돌려받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큰 절을 하며 자기도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다. 다음날 언론 사진에 뜬, 경찰 살수차 앞을 막아선 이가 바로 그이다.
글쎄, 나는 이런 우애의 공동체는 강력한 폭압 앞에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한편으론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쨌건 그날 우리는 모두 평등했고, 그 공간과 서로를 지키기 위해 보여준 분투는 인상 깊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평등의 힘을 목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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