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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이 만들어갈 변화

노동자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기 위해서는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에서 화재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이 되는 5월 29일,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영정을 들고 모인 유가족들은 “사고 원인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사고 책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며, 두 번 다시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 위한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낯설지 않은 내용의, 반복되는 요구안이다.

 

반복되는 요구, 변하지 않는 일터

유가족들의 기자회견 바로 전 날인 5월 28일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노동자 4주기이기도 했다. 당시 스크린도어 수리를 맡겼던 서울메트로는 2인 1조 작업 원칙을 내세웠지만 하청 업체에 그만큼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에 원칙은 사실상 무의미했고, 결국 혼자 일하던 노동자가 사망했다. 서울메트로는 “노동자가 2인 1조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사고”라는 입장을 냈다가 뭇매를 맞고 사과하기도 했다. 그 때에도 동료 노동자들은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고 시민 대책위를 꾸려 직접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안을 냈다.

서부발전, 우체국, 서울의료원 등 공공기관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 여러 번 조사위가 출범하고 보고서를 냈지만, 운영 기관인 정부는 이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아왔다. 권고안 중 일부만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차일피일 미루는 식이었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앞에서 조사보고서와 권고안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하물며 공공기관도 이러한데, 민간 기업은 어떨까? OECD 산재사망률 1위를 놓치지 않는 나라, 매일 하루에 7명이 퇴근하지 못하는 나라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산업재해는 단지 보상의 대상?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님 사망 이후 ‘김용균법’이라는 이름 아래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다.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산재 사고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확인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법 개정 이후에도 산재로 인한 사망은 반복되고 있다. 보수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사업주 처벌을 강화한다고 산재율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처벌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처벌의 필요성이 아니라, 어째서 일터는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적은 돈으로 하청을 맡기고, 하청업체는 그 적은 돈에서 조금이나마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노동자를 쥐어짠다. 2인 1조가 원칙인 업무에 한 명만 투입되고, 안전장비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며, 위험하더라도 빠르게 업무를 진행하도록 강요한다. 위험한 일터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 아래에서 용인되고, 또 강화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산업재해는 변화의 계기보다는 보상의 대상이 되며, 산업재해에 대한 대응은 ‘사고에 따른 보상’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안전하지 못한 일터에서 노동자들은 산재로 사망한다. 기업에게는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비용보다 보상금이 더 적으니 일터를 바꿀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기업의 보상은 산재 피해자에게 애도와 위로를 전하고 일터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담아야 하지만, 지금 산재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변화는커녕 위로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보상금’을 둘러싼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그렇지 않아도 힘든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사고를 단지 보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구조와 인식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일터에서의 사고를 처벌과 규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때, 사고의 발생은 규제의 미흡 또는 실패가 된다. 규정을 어긴 사람만을 찾아내서 처벌하는 식으로 산재에 대응하게 되며, 이는 결국 피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책임까지 떠안기는 결과를 낳는다. 더 큰 이윤을 남기려는 기업의 활동이 위험한 노동 환경을 만들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은 다시 이윤이라는 잣대에 비춘 비용으로만 평가받는다. 산재 이후 보상금의 액수만 쟁점으로 남고 일터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터를 바꾸기 위해서, 이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이해하는 방식을 새롭게 물을 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해 물어야 할 책임

5월 27일, 13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노동자들이 2006년부터 15년간 요구해왔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책임이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강력한 처벌을 규정하는 법이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도 기업을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원청의 책임까지 묻기는 쉽지 않았다. 법 위반으로 인해 노동자가 사망하더라도 기소율은 낮으며, 설령 기업의 책임을 묻더라도 낮은 금액의 벌금이나 과태료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현장 담당자뿐 아니라 경영진과 원청, 관리감독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책임까지 구체적으로 묻는다는 점이 다르다. 이를 위해 기업에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와 같은 구체적인 의무를 지우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재를 단순히 보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도전한다. 산재는 누군가의 부주의나 실수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이 만들어낸 구조적 ‘사건’에 가깝다. 그렇기에 산재 이후의 대처는 규정 위반 여부에 따른 보상금을 책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의 활동이 노동자를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인식 아래에서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온 책임자를 처벌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단순히 처벌 조항을 만들고 높은 형량을 매기는 데 그치는 법이 아니라, 노동자 안전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의무를 지우는 법이다. 산재에 대한 대응은 ‘사고에 대한 보상’뿐 아니라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나아가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만들어갈 변화다.

또한 안전한 일터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책임은 사고가 발생한 사후에 잘 대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정보와 권한이 주어질 때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사례에서 증명되었다. 노동자의 역량을 강화하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데에는 기업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현장에서 노동자의 알 권리를 증진하고, 작업중지권을 포함한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까지 이어져야 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구의역 참사 때 서울메트로가 그러했고, 태안화력발전소 참사 때 한국서부발전이 그러했듯이 기업은 언제나 일터에서 벌어진 사고의 원인을 노동자에게 돌리려고 한다. 사고에 대해 물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책임 소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업은 ‘2인 1조’나 ‘작업장에서 뛰지 않기’처럼 지키지도 못할 안전 규정만 제시한 채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 듯 발을 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기업의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 사망 이후 시민들이 붙였던 포스트잇에는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해 2,400명이 일하다 죽는 사회는 뭔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죽음의 책임이 죽은 자에게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산재 대응이 ‘사고에 따른 보상’에 그치지 않도록,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에 따른 처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통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