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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퇴출시키라는 요구에 맞서

올해 초, 병역거부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동료에게 책 한 권을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흑인이자 성소수자인 조지 M. 존슨이 쓴 회고록 『모든 소년이 파랗지는 않다』였는데, 이 책을 보는 순간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했던 그 동료가 떠올랐거든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이 책이 2022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금서 지정 요구’를 받은 책(Challenged Books)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소수자가 쓴, 성소수자에 대한, 성적으로 노골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이유로요. 토니 모리슨의 1970년작 『가장 푸른 눈』 또한 평등·다양성·포용성(Equity, Diversity and Inclusion: EDI)에 반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어야 할 책으로 지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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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도 이 금서 목록을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5월부터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보수 학부모 단체가 150여 권에 달하는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민원을 제기하고, 그 결과로 이 도서들에 대한 열람이 제한되지 않았다면요. 그리고 지금도 전국 각지의 공공도서관들에서 몇 권인지도 모르는 성평등·성교육 도서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구조적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조직되는 과정

비교적 최근 흐름이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인종이나 성소수자를 다룬 책들에 대한 도서관 퇴출 요구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비판적 인종 이론’이나 ‘성정체성 및 젠더 교육’을 공교육에서 금지·제한하는 제도적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만큼 정치적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트럼프부터 현재 유력 대선 후보인 디샌티스와 같은 정치인들이 이런 조치들의 선두에 서 왔죠. 지난 중간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이 ‘문화·이념 전쟁’을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 또한 거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혐오를 위시한 우파 포퓰리즘 정치의 선두에는 소수가 앞장서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정치의 언어가 점점 더 많은, 특정한 학부모들에게 공감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해당 도서나 교육을 통해서 자신이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토니 모리슨의 책은 미국사회 내 뿌리 깊은 인종차별 역사를 성찰하게 하면서 흑인·여성의 삶을 가시화했기 때문이 EDI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제는 사라졌다고 여기는) 인종차별의 역사를 통해 백인에게 죄책감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며 갈등과 분열을 예고하기 때문에 EDI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러한 방어적 반응 역시 사회적인 것입니다. 미국사회의 인종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을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자신(백인)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후자에 대한 도전을 물리쳐 인종적 편안함을 되찾고 인종적 우위를 유지하는 과정을 로빈 디안젤로는 일찍이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라고 개념화한 바 있습니다. 현재의 금서 지정 및 퇴출 운동은 차별의 역사 혹은 ‘구조적 차별’을 인식할 것을 요구하거나 보다 사회변혁적인 평등 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조직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미국사회의 가장 또렷한 구조적 차별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금서’를 지목하고 이를 공공·학교도서관에서 배제하려는 가시적인 흐름이 등장한 한국사회는 어떨까요? 2008년 MB 정권에서의 이른바 ‘국방부 불온서적’은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를 가리키고 있다면, 2023년의 ‘금서’는 명백하게 반동성애·반페미니즘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구조적 성차별’에 대한 부정이 보수 학부모 단체의 성평등·성교육 도서 퇴출 운동을 본격화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정상가족’에 기반한 반동성애·반페미니즘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공격하는 운동의 최전선에 ‘보수 학부모 단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는 진실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해당 보수 학부모·시민단체는 학생인권조례를 포함한 각종 지자체 인권조례 개정 및 폐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저지, 포괄적 성교육 반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반대 및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 저지,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태아생명보호 입법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보수개신교 기반 단체들입니다. 이른바 ‘혐오선동세력’으로 지목된 보수개신교가 지난 시기를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반동성애 기조로 움직여왔다면, 현재의 학부모 정체성은 보수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학습한 후 보다 ‘친화적’인 전략으로 선회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성평등·성교육 도서 퇴출 운동에서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반동성애라는 ‘진짜 목표’를 우회하려는 보수개신교 세력의 전략으로만 보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가족 가치’를 강조하며 레이건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미국 보수개신교 우파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수개신교·여성단체들이 가족을 파괴하는 주체로 여성가족부를 지목하면서 폐지 운동에 나서고 '다시 가정으로', '한 자녀 더 갖기' 운동을 펼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연구자 이숙진의 지적처럼 보수개신교의 동성애 혐오 정치의 뿌리에는 “정상가족의 해체에 대한 위기의식과 정상가족 복원기획”이 놓여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질서를 복원하려는 오랜 역사적 시도에서 사실상 반동성애·반페미니즘은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된 적도 없지요. 페미니즘이 성소수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시스젠더 ‘여성’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 사회에서 ‘성평등 NO, 양성평등 YES'라는 슬로건이 보수적 여성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으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는 점 또한 다시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현재 보수개신교의 성평등·성교육 도서 공격에 정치권, 특히 지자체장이나 지방의회 도·시·군의원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점, 도서 및 도서관에 대한 대대적인 정책 후퇴 또한 어두운 미래를 짐작하게 합니다.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충남 지역 내 공공도서관에서 10권의 성평등 도서의 열람을 제한한 데 이어서, 서울, 부산, 경기 등 전국의 지방의회 의원들이 ‘음란유해도서’라는 선동과 함께 성평등·성교육 도서의 색출 및 퇴출 요구에 나서고 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 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도서·도서관 및 성평등 정책은 그저 우려라고 하기에는 역행 흐름이 뚜렷합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성인지 교육 관련 영상제작 용역사업을 진행하며 ‘성평등’, ‘여성혐오’ 등 특정 단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검열한 사실이 알려졌고, 2024년 예산안에서 60억 규모의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사업예산은 전액 삭감되었습니다. 게다가 최근 여성가족부가 10년 동안 진행해온 ‘성 인권 교육’ 사업을 내년에 폐지하겠다고 밝혀, 이에 반대하는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 대응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 방향 아래 학부모 우려 등을 핑계로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검열과 제한 역시 본격화되겠지요. 한국도 미국처럼 성평등 도서 퇴출 요구가 정치적 양극화를 추동하는 ‘이념 전쟁’으로 번지게 될까요?

 

성평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대항 정치

충남에서 보수 학부모 단체의 집요한 민원 공격이 이어지고 게다가 충남도지사까지 나서서 성평등·성교육 도서 열람을 제한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많은 대항 움직임들이 이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지역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나서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금서로 지목된 도서들을 읽고 토론하는 <릴레이 성평등 책담회>를 열었습니다. ‘예민한 도서관’은 <#유해도서_아니고_필독도서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시민들이 공공도서관에 해당 도서들을 희망도서로 신청하거나 구매해서 읽도록 촉진했고, 또 다른 이들은 거리에서 <행동독서회>를 열었지요. 덕분에 여성가족부에 의해 회수된 ‘나다움 어린이책’ 선정작들을 포함해 지금 금서로 지목받은 책들이 다시금 화제가 되었습니다. 출판 및 도서관 관련 단체들의 성명이 연달아 발표되고, 올해 제9회 금서읽기주간에는 성평등·성교육 ‘금서’를 함께 읽자는 제안이 이루어졌습니다. 충남 홍성군 홍동마을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홍성 국제 금서 대축제>는 많은 학부모와 어린이·청소년들이 모여 성황리에 마쳤다고 합니다.

304명의 충남도민과 『걸스 토크』의 이다 작가가 공동진정인이 되어 차제연과 충남차제연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지만, 제도적인 판단이 나올 때까지 ‘차별’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필요가 없음을 이미 많은 시민들이 대항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조적 차별’을 삭제하고 갈등과 혼란 없이 평온해지고자 하는 정치의 역행을 바꿀 힘은 바로 이런 목소리와 움직임들을 계속 이어가고 확장하는 데서 나올 테니까요.

“1920년대 경성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의 강연회 등 여러 문화 행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된 공통적(common)인 것으로서 지식의 보편성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아래 조선의 사회교육시설로서 기능한 경성도서관을 연구한 조윤정은 당시 현대소년구락부와 조선여자청년회 등이 개최한 강연회들이 성별이나 연령 제한, 시간과 금전의 부족 등으로 도서관이라는 열린 공간을 향유하지 못했던 존재들과 그 목소리들을 가시화하는 공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민족’이라는 단일한 지향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여성·어린이가 주체가 되어 사회적 불평등과 지적 고립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로서, ‘공공성’ 항쟁의 관점에서 볼 걸 제안했습니다. 성평등·성교육 도서와 도서관이 공격받는 2023년, 우리는 어떤 ‘공통의 것’을 다시 혹은 새롭게 세워야 할까요? 자신에게 성평등·성교육 도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어린이·청소년, 양육자를 비롯한 지역주민, 보다 더 많은 동료들과 이제 그 내용을 다시금 함께 만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 지난 8월 1일 충남에서 열린 <공공도서관을 향한 성평등 책 금서 요구,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 자료집은 이곳(클릭!)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