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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터뷰> 김삼석(남매간첩단 사건 복역) 씨

“김영삼 정부에 희망도, 기대도 없었다”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93년 9월 구속, 지난 9월 30일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김삼석 씨를 뒤늦게 만났다.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단 사건’은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이후 최초로 터진 조작간첩사건으로, 이 사건은 이후 안기부 프락치 배인오 씨의 양심선언 등으로 94년말까지 계속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편집자주>

1. 출소소감은

=많은 양심수를 두고 나혼자만 나와서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대전교도소만해도 40년 이상 복역한 분들을 포함해 15명의 장기수가 있다. 그리고 딸아이 ‘하나’(구속당시만 해도 엄마 배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새 다섯살이 되었다)를 실컷 안아볼 수 있게돼 기쁘다.

2. 감옥 생활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반반이다. 우선 잃은 것은 교묘한 김영삼 정권 내내 감옥 안에 있다보니까 더욱 치열하게 자주통일운동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인데, 이 점에 대해 죄송하다. 또 얻은 것은 다양한 독서와 일반수의 생활을 보면서 사회의 다향한 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다.

3. 문민정부 들어 안기부에 의한 첫 구속자인데, 4년이 지난 지금 문민정부의 인권상황 및 안기부의 변화에 대해 짚어본다면?

=문민정부라 생각해 본적이 단한번도 없다. 김영삼 정부는 3당 야합을 통해 탄생한 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기대도, 희망을 건 적도 없다. 실제 지난 4년동안 60여 명의 열사가 묻혔고, 4천여 명의 양심수가 발생했다. 김영삼정부 들어 첫 구속된 내가 나오던 바로 그날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이 터졌는데, 집권말기 간첩조작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4. 당시 안기부 내에서 당한 불법수사 및 성추행, 잠안재우기 고문 등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93년 12월 17일 첫 공판에서 김삼석 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이 임신 8개월인 부인을 연행하겠다는 등의 협박과 구타, 잠안재우기, 성고문 등을 폭로하였으며, 검찰 또한 폭언과 강압으로 수사하면서 묵비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증언했다)

=몸은 그래도, 마음으로는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수사당국은 유도신문을 하면서 “협조해주면 동구라파에서 공부하게 해주겠다”는 식의 유혹을 했는데, 고문당한 사실보다도 수사를 당해본 경험이 거의 없어 고생을 많이 했다. 활동가라면 수사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5. 김삼석 씨는 안기부의 강압적 자백강요를 고발하기 위해 변호인 접견도중 벽에 머리를 들어박는 등 자해행위를 했다. 또 머리를 받고 쓰러지는 과정에서 꼬리뼈가 구부러졌고, 목에는 기부스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수사에 대한 대응방법을 알지 못하다보니 너무 당한 측면이 있다. 몸이 고생한 것인데, 스스로 자해한 것은 나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었다. 수사과정에서 묵비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유도신문에 대답하면서 수사양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수사를 축소․중단할 필요가 있었다. 더이상 안기부의 작품만들기에 말려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됐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6. 결국 아무런 증거없이 재판을 받고,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받았는데, 억울한 생각은 없는지.

=안기부가 언제 증거를 갖고 있었는가. 증거 자체도 조작이니까 말이다. 안기부는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김정일 선집』 등을 누군가를 시켜 우리에게 전달한 뒤, 이것을 증거로 만들었다. 이는 안기부 프락치 배인오의 양심선언을 통해 드러났다. 프락치까지 이용해 증거를 만든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 것이다. 늦게나마 국보법 어기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

7. 93년 9월 사건 발생당시부터 안기부의 프락치공작에 의한 사건이라고 밝혔고, 이후 94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배인오(당시 ‘남누리 영상’ 대표, 본명 백흥용) 씨가 양심선언을 통해 김삼석 남매간첩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혔는데, 왜 항소심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담당인 이기욱 변호사가 배인오의 양심선언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사법부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안기부에서의 수사진술서가 검찰에 그대로 인용되고, 다시 그것이 판결문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가족과 변호사의 변론은 재판과정에서 받아들여질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안기부의 프락치 작업이 백인하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식 사건, 김형찬 사건 등에서도 알수 있듯이 제2, 제3의 배인오(프락치)가 항상 우리와 베개를 같이 베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된다. 우리 곁엔 항상 안기부 프락치가 같이 살고있다고 본다.

8. 93년 10월 28일 「김삼석․김은주 간첩조작사건 대책위」 구성, 12월10일 일본 「김삼석․김은주 남매를 구원하는 모임」 등이 결성되어 지원사업을 해왔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일본 「김삼석․김은주 남매를 구원하는 모임」(대표 마찌이 시게끼, 변호사)과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모임회 회원들이 일본에서 시장바닥을 돌아다닌 덕택에 시장에서 일하시는 많은 재일동포들이 물묻은 손으로 석방탄원서에 서명을 해주셨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힘이 되었다. 일본 관련 구속자뿐아니라 다른 통일인사들에게도 뜨겁게 성원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앞으로도 지지과 성원을 바란다. 또한 인권운동사랑방을 비롯해 민가협, 민변 등 인권단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