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608호실. 지난해 3월 서울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현장에서 원인 모를 화염에 휩싸여 전신 3도의 중화상을 입었던 백석호(29) 씨는 지금도 화상의 후유증과 싸우며 힘겹게 병실을 지키고 있다.
그에게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98년 3월 30일 새벽. 당시 백석호 씨가 피해를 입은 도원동 재개발현장에서는 도원동 세입자들이 철거깡패들에 의해 외부와 고립된 채 힘겹게 철거반대 농성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철거민 지원 나섰다가…
청량1동 철거민이었던 백 씨는 도원동 주민들이 고립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3월 29일 밤 도원동 재개발지구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홀로 재개발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새벽 1시경, 때마침 고립된 주민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철거민연합 소속 회원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재개발현장 내 농성철탑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백 씨는 “같은 철거민 입장에서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대열 후미에서 마대자루를 짊어지고 농성철탑으로 향하던 백 씨는 불현듯 “너무 경솔하게 행동한 게 아니었나”하는 생각으로 되돌아섰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날라 온 돌에 맞아 쓰러진 뒤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곧이어 등줄기가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그는 전신 3도의 중화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 날 새벽, 백 씨와 함께 농성철탑으로 진입하던 철거민 가운데 이범휘(61) 씨는 철거깡패들에게 붙잡혀 집단폭행을 당했고, 그로 인해 전신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백 씨가 입은 화상은 당시 철거민들이 방어용으로 소지하고 있던 화염방사기(농약분무기를 개조한 것)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화염방사기를 백 씨에게 사용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혹으로 남아 있다. 사건 발생 이후 줄곧 백 씨를 간병해온 신중식(청량1동 주민) 씨는 “평소 악랄한 철거깡패들의 소행과 이범휘 씨를 그 지경으로 폭행한 점들에 비춰볼 때 백석호 씨 사건도 철거깡패들의 소행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부서진 청춘, 꺾인 희망
이번 사건으로 백 씨는 좌․우측 손가락을 각각 세 개씩 잃었다. 또 상반신과 양쪽 팔, 우측 얼굴과 머리를 뒤덮고 있는 화상흉터는 수술을 받더라도 완치되기 어려운 상태다.
지금 백 씨는 화상에 뒤따르는 가려움증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이제 영원히 노동이나 운동을 하며 살아가기 힘들다는 점이다. 들이마신 화기 때문에 폐가 오그라들었고,그에 따라 발생한 기관지염증 때문에 백 씨는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1백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이 가빠온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는 약물로도 치유되지 못한다고 하며, 이제 그에겐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차 낯설어지고 있다.
백 씨의 아픔 가운데 또 하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없는 처지. 그의 어머니(75)는 아직 막내아들의 입원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돼 사실을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씩 어머니께 전화로 안부를 전한다는 백 씨는 “이번 명절 때도 어머니께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려되는 제2, 제3의 백석호
도원동 재개발지구에 대한 강제철거가 이뤄진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백석호 씨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했듯 도원동 철거민들의 처지도 달라진 게 없다. 지난해 4월 24일 경찰과 용역회사 직원들에 의해 농성철탑에서 끌려나온 철거민들은 새 봄을 맞는 지금까지도 용산구청 앞에서의 천막농성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백석호 씨는 “나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제2, 제3의 백석호 씨가 나타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IMF시대라는 최악의 경제여건 속에서도 개발의 미명아래 강제철거는 계속되고 있고, 그에 따라 도시빈민들의 저항과 탄압의 악순환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