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외곽, 인적이 드문 야산에 허름하게 서 있는 바울선교원 안이 소란스럽다. 방송사 카메라와 빼곡이 채워지는 기자수첩들, "당신들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는 거야?"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시설장(최선이 목사)과 동요되는 기색이 별로 없이 어리둥절한 시설생활자들의 모습까지. 새로운 풍경은 아니다. 매년 서너 차례 불거졌다가 사그라드는 '시설문제'다.
'시설문제'는 크게 시설생활자의 인권침해와 시설운영자의 비리사실로 사회에 드러난다. 바울선교원 생활자의 제보 내용 역시 아동학대, 성폭력, 구타 등과 시설장의 기초생활보장비 착복 의혹, 수급권 도용 의혹 등이다. '시설문제'의 설정이 이러한 탓에 '해결' 역시 시설생활자들의 처지에 대한 연민, 시설운영자의 부도덕성에 대한 공분에 힘입어 이루어지곤 했다. 그래서 시설운영의 비리가 교묘할수록, 지역기관이나 경찰과의 관계가 돈독할수록 시설문제의 해결은 난망해진다. 바울선교원 역시 문화방송에 한차례 보도된 적이 있으나 지역에서 최선이 목사에 대한 구명운동이 진행될 정도였다고 한다.
쳇바퀴 도는 시설문제
물론, 인권운동진영은 몇 년 전부터 시설의 존재 자체가 인권침해라는 문제의식을 던져왔다. 수용시설의 기원은 사회방위를 위해 위험한 사람들을 격리시키려는 발상에 있으며 실제 시설의 운영도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더욱 격리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들어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으며 '탈시설화'는 이미 시작된 흐름이다. 경기도 여자기술학원 화재사건이나 양지마을 사건과 같은 과거의 대표적인 시설문제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수용소의 성격을 분명히 지적하였다면 최근의 시설문제는 시설이 양질의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묻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 소규모의 그룹홈 등을 통해서 시설생활자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시설의 존재 자체가 인권침해라는 문제의식은 좀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시설의 현장조사에서 시설생활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구타당한 적 있습니까", "기초생활보장비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식사는 괜찮습니까"와 같이 시설 '안'의 생활에 대한 질문들이다. 그런데 시설 입소 후 돈은 만져본 적도 없고 반찬은 너무 맛없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맞았어요"라며 항변하던 ㄱ씨는 바울선교원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
헤어날 수 없는 사람들
ㄴ씨는 머리에 뇌수술 자국이 남아있고 양다리는 무릎 아래서 절단되었다. 18세에 추락사고로 뇌수술을 받았고 7년 전 동상으로 인해 다리를 절단했다고 한다. 집안 형편상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 했고 번데기 장사를 하다가 16세에 '노가다'를 시작했다고 한다. 벽돌을 나르는 일을 하던 그는 공사장에서 식사 때마다 곁들여지는 소주를 마시며 술을 배웠고 사고 당일도 술을 마신 상태에서 벽돌을 나르다가 추락했다고 한다. 이후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가 집에서 나가라고 하여 바울선교원 입소 전에는 노숙생활도 했다고 한다. 동상이 생긴 것은 그 때문이고 수술 후에 바울선교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 복용중인 정신과 약물의 부작용으로 낮에도 끊임없이 졸리다고 호소하는 ㄷ씨는 10여년 전 "다방에서 일했는데 거기 사무장한테 강간당했"다고 한다. 그 후 남성이 한 명이라도 있는 공간에서는 공포를 느끼게 되고 환청까지 들려 정신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증상은 점차 사라졌으나 3년 전에는 불면증이 심해졌고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6개월마다 청량리와 은평의 정신병원으로 병원만 바꾸며 지낸 시간이 무려 30개월이라고 한다.
왜소한 체구에 왼쪽 안구가 움푹 들어가 있는 ㄹ씨는 8년째 바울선교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9세에 수술후유증으로 시신경이 손상된 후 안구가 함몰되기 시작하여 지금처럼 되었다고 한다. "보기에 흉한" 것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장처럼 사람들 많이 있는 데는 기대할 수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일을 하기 위해 양계장, 목공소, 식당 주방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굴이랑 몸 여기저기에 뭐가 나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나마 여의치 않았고 시설 입소 전 수년간은 노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시설생활자가 박탈당한 권리
시설생활자들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동안 겪게 되는 인권침해는 다양하다. 신체의 자유뿐만 아니라 참정권을 박탈당하거나 건강하게 살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설생활자들을 만나보면 시설 '안'에서의 인권침해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시설로 입소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겪는 인권침해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위의 생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시설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양한 사회권의 박탈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시설문제에 대한 접근은 시설 '안'의 문제에 주목했다. 문제가 있는 시설이 폐쇄되면 시설생활자들이 살 수 있는 다른 '시설'을 알아보는 것이 은근히 어려운 과제이기도 했다. 정부 역시 좀더 투명한 '시설'에 대해 더욱 많은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시늉을 했다. 시설정책의 담당자인 국가나 시설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사회단체들 모두에게 시설 안팎의 경계는 고정된 것인 셈이다.
흔히들 시설생활자들이 시설에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편견을 든다. 그래서 시설운영자들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거두어주는 훌륭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사회의 책임은 시설운영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귤 한 박스에서부터 금일봉까지 시설을 후원하고 자원활동을 통해 지원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오갈 데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갈 데'다. 바울선교원이 제공한 것은 오직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었을 뿐이다. 국가는 사회권 박탈에 대한 의무불이행의 문제를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복지시설의 문제로 대체해버린다. 사회복지시설이 양질의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본분에 충실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시설문제는 시설만의 문제로 접근되어서는 안 된다.
시설문제, 주거 공공성 확보로 풀자
같은 치매노인이라도 돈 있는 집 노인은 실버하우스로 가고, 없는 집 노인은 시설에 맡겨지는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시설문제는 끊이지 않고 반복될 것이다. 사회복지시설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주거의 공공성과 노동권, 건강권 등 제반 사회권의 침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 시설문제의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시설에 입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한 물질적 전제인 주거를 공급하기 위한 단계적인 계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설생활자들에 대한 정책은 좀더 나은 시설을 위한 사회복지정책 뿐만 아니라, 주택 공급을 위한 주거정책의 차원에서도 접근되어야 한다. 기존의 주거정책은 공공임대주택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현재의 공공임대주택은 쪽방이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노숙인들처럼 단신생활을 원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적절한 주거공간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에게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별도의 주택정책 입안과 예산책정이 필요하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원룸과 같은 형태의 주택에 대한 매입임대정책과 주거급여의 현실화와 동시에, 주거공간이 필요한 단신생활자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주택을 건설하고 무상으로 공급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만 하겠다.
덧붙임
미류 님은 행동하는의사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