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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복지부, 수혈감염 빌미로 '전염병 병력자' 정보 제공

적십자사에 매주 제공하기로…실효성 의문에 정보유출 위험까지

보건복지부(장관 김근태)가 수혈 과정에서의 감염 예방을 빌미로 법정전염병 병력자 정보를 민간기구인 대한적십자사에 제공하기로 해 물의를 빚고 있다.

지난달 19일 복지부와 적십자사의 회의결과를 정리한 <법정전염병 병력자 정보제공방안 논의 결과> 문건에 따르면 △질병관리본부가 관리 중인 법정전염병 병력자 명부를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매주 제공하고 △적십자사는 병력자들을 '헌혈 일시유보군'으로 등록해 헌혈을 제한하며 △이를 위해 적십자사는 기존 혈액정보관리시스템(BIMS)에 병력자 입력체계를 신설하기로 했다. 적십자사가 준비를 마치는 데는 약 4개월이 걸릴 것으로 알려졌다.

질병관리본부의 <2004년 전염병통계연보>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법정전염병 발생자 수만 해도 10만9266명에 이르며 실제 적십자사에 제공되는 병력자 정보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전염병 병력자란 '과거 전염병에 걸렸던 사람'일 뿐 완치된 대다수 사람의 정보도 함께 넘어갈 형편이다. 복지부도 이 점을 인정하고 헌혈 문진 과정에서 헌혈가능기간 여부를 확인해 체혈 가능할 경우 유보군에서 해제한다는 방침이지만 그 전까지는 모든 병력자의 정보를 일단 적십자사에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전염병 병력자가 헌혈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정보가 포함됐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이를 삭제할 방법도 없게 됐다.

복지부 방침에 대해 'HIV/AIDS 인권모임 나누리+'는 8일 성명을 통해 "법정전염병 병력자들의 혈액은 현재의 혈액검사시스템을 통해 감염여부가 판정되므로 굳이 정보가 사전에 제공될 필요가 없다"며 "혈액안전관리의 부실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전염병 병력자들이 마치 고의적인 전염자들인 것처럼 편견을 조장하는 비열한 대책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적십자사는 법정 전염병 48종 가운데 △B형간염 △C형간염 △에이즈 △말라리아 △광우병을 '헌혈 일시유보군'으로 관리하고 있다. 또 △B형간염 △C형간염 △에이즈 △매독 △말라리아 등 5개 질병에 대해서는 혈액 전수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홍역·결핵 등 다른 법정전염병에 대해서도 최소 1개월에서 최대 3년까지 채혈금지기간을 설정하고 있어 굳이 수혈감염 예방을 위해 적십자사가 전염병 병력자 명부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병력자 명부, 혈액 안전에 도움 안돼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혈액 안전성 문제는 적십자사가 규정을 지키지 않고 엉망으로 하는게 문제이지 전염병 환자가 헌혈을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현재 장비로 제도와 규정을 지키기만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안전하다"고 지적했다.

병력자 명부를 받게 될 적십자사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동희 적십자사 혈액안전국장은 "에이즈의 경우에는 이미 병력자 명부를 받고 있고 다른 전염병은 명부를 받더라도 지금보다 나아지는 점은 없다"며 "지난 국감에서 지적됐고 정부에서도 (명부를) 준다고 해서 받기로 했지만 개인정보를 우리가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전염병 병력자 명부 제공은 실효성도 없을뿐더러 개인정보 유출로 발생할 위험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진보네트워크 이은희 활동가는 "병력정보 같은 의료정보는 굉장히 민감한 개인정보로 만에 하나라도 유출된다면 개인에 대해 심각한 고통을 준다"며 "보험회사, 결혼정보회사 등에서 탐낼만한 정보여서 언제든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인력파견회사가 일종의 블랙리스트로 사용하며 고용에서의 차별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법적 근거도 없이 진행

게다가 복지부가 별다른 법적 근거도 없이 개인정보를 민간기구인 적십자사로 넘기려 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대한적십자사조직법 제8조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적십자사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는 적십자사의 업무수행에 관하여 협조할 수 있다"고 규정할 뿐 병력자 명부와 같은 개인정보를 제공할 근거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공공기관의개인정보보호에관한법률 제10조는 "다른 법률에 의하여 보유기관의 내부에서 이용하거나 보유기관외의 자에게 제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보유목적외의 목적으로 처리정보를 이용하거나 다른 기관에 제공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복지부 혈액장기팀 관계자는 "현행법에 저촉되는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법정전염병 환자에 대해 채혈을 금지하고 있는 혈액관리법이 있으니까 문제없다고 본다"며 "제공되는 정보를 최소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정보유출 문제는 적십자사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강 공동대표는 "근본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혈액사업을 민간기구인 적십자사가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며 "적십자사에서 혈액관리 기능을 분리해 국립혈액원을 만들어야 혈액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관심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