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충남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 폐지안’이 충남도의회에 입법예고됐다.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 24명과 국민의당 소속 의원 1명이 공동발의한 폐지안은 2월 2일 가결된다. 이를 공포할 수 없었던 충청남도가 재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충남도의회는 자유한국당 25명과 바른미래당 1명의 의원만으로 회의를 열어 전원 찬성으로 다시 한 번 폐지안을 가결했다. 현재 충남인권조례는 대법원에 재의결 무효 확인 청구 소송이 제기된 상태다. 세계사에 유례없을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인권조례’
문제는 ‘충남’이 아니라 ‘인권조례’였다. 지난 4월에는 충북 증평군의회가 인권조례를 폐지했다. 작년 10월 증평군의원들이 만장일치로 제정한 조례였다. 자유한국당 3명, 더불어민주당 2명, 바른미래당 1명, 무소속 1명이 인권조례를 제정할 때에도 폐지할 때에도 뜻을 함께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성적 지향’이 문제가 됐나보다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충남인권조례나 증평인권조례에 성적지향, 성소수자와 직접 관련된 문구는 없다. 내용이 무엇이든 ‘인권조례’ 자체가 혐오선동세력에게는 악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순천과 인천의 청소년노동인권조례, 대전의 학생인권조례 등 제정이 무산되는 사례도 계속 생기고 있다.
혐오선동세력은 인권의 가치가 확산될수록, 인권의 제도가 촘촘해질수록, 자신들의 권력이 줄어들 것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들은 인권조례가 “테러 집단이나 사이비 종교집단들까지도 인권으로 옹호”한다거나 “급기야 동성애도 성적 지향, 성소수자 인권으로 포장”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며 이슬람교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을 배격하고 부정하려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될까, 대체복무제가 도입될까 전전긍긍 불안해한다.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 편견과 혐오를 과학으로 포장하는 교수, 반공보수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저지하려는 보수시민단체 등이 이해관계의 교집합을 찾아내더니 인권조례 공격에 불을 붙이고 있다.
지방분권시대를 먼저 여는 혐오선동세력
혐오선동세력의 ‘아무말대잔치’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쉽지 않고, 그리 바람직한 방식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들릴 만한 이야기’가 아니며 들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는 있다. 그걸 제대로 못한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차별을 학습당하고 있다.
18대에 제정을 시도했다가 학습당하기 시작한 국회는 19대에 스스로 발의한 법안을 철회하더니 20대에는 먼저 눈치 보며 가만히 있는 중이다. 2012년 대선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후보는 2017년 대선에서 더 이상 차별금지법을 말하지 않았다. 국정과제 누락에 이어 NAP(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초안에서조차 차별금지법이 후퇴한 상황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유보되는 동안,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이 ‘여론’이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혐오선동세력이 지역인권조례 폐지운동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국회와 정부를 ‘미션 클리어’했으니 다음 미션은 ‘지방’이 아니겠는가. 지역인권조례폐지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이들은 예비후보들에게 질의서를 보내고 있다. 1번 질문은 이렇다.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을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희 단체들은 ① 답을 지지함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친절한 이들의 3지선다형은 이렇다. ①제정 반대, ②답변 유보, ③제정 찬성. 심지어 참고자료까지 첨부하여,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학교는 동성애를 정상으로 가르치고, 남성 트랜스젠더가 여성 화장실 등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성폭력 위험이 증가한다.”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다.
학교는 동성애를 정상으로 가르쳐야 하고,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는 여성 화장실에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과 성폭력 위험 증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권의 증진을 위한 한국사회의 과제다. 내용이 이렇고 보면 ③으로 줄을 그어 답변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질의서는 그냥 무시하는 게 낫지 않나 싶다. ①이든 ③이든, 반응할수록 혐오선동세력의 영향력을 확인시켜줄 뿐이니 말이다.
질의서는 무시하더라도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를 직접 하는 후보도 있다. ㅇ지역의 교육감 예비후보 ㅈ의 문자메시지를 우연히 보게 됐다. “교육현장에도 영적전쟁이 있”다며 “복음가진” 자신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메시지였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돼지머리 고사 등 우상숭배 문화’도 막아내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기독교 신자들이 더욱 부끄러운 일은 아닐는지. 질의서 등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과 후보로서 혐오선동에 동참하는 것은 성격이 다른 문제다. 우리가 낸 세금이 혐오선동에 쓰이는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식상한 표현이 있다. 실제로 선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권력을 더 가진 사람과 정당일수록 유리하고, 진지한 토론보다 눈 가리는 선동이 효과적이고, 인권보다 이권이 더 쟁점이 된다. 그래도 선거기간이 되면 여러 의견과 입장을 가진 개인 및 집단이 사회를 향해 더욱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만은 사실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려면 더 가녀린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 있도록, 더 감추어졌던 얼굴이 더 멀리 보일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의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를 공공연하게 선동하는 말들이 횡행한다면 이건 특정 후보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 자체의 문제가 된다.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가 제안된 취지도 위와 같은 이유다. 혐오선동세력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말이 ‘아무말대잔치’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아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정치인들에게서 가장 더디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혐오선동세력에게 연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야 당선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과, 당대의 편견과 혐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의 한계가 뒤섞여 넙죽 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을 ‘교정’하는 역할을 선거관리위원회가 해야 한다. 선거운동을 핑계로 인권을 부정하는 혐오선동이 횡행하지 않도록 해야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인권조례 그 이상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는 D-30인 5월 14일 발족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가기 전까지 ‘평등한 ㅇㅇ(지역명) 만들기 시민선언’을 조직할 것이다. 지방분권시대는 혐오가 아니라 평등과 인권이 대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하여 선거관리위원회 등 국가기구의 역할을 촉구하는 활동도 할 것이다. 헌법의 평등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혐오선동이 방치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선거운동기간에는 신고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공보물이나 유세 등에서 혐오선동이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지 실태를 파악하고 대응책을 모색할 것이다.
6월 13일이면 종료될 활동이지만 그 성과가 인권조례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폐지된 조례를 회생시키고, 무산되었던 조례들을 제정하고, 개악됐던 조례들도 더 빛나게 개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인권조례 그 이상이므로.
한국사회는 이번 지방선거를 거치며 평등으로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을까? 지방분권시대는 민주주의의 진전과 심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적어도 지방선거 혐오대응 전국네트워크는 움직일 것이다. 혐오선동세력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 인권의 원칙을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