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조사를 위한 상설 기구 설립은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이었고, 당선 후 100대 국정과제에도 포함된 정책이다. 2017년 연말 박주민 외 10인의 국회의원이 「국가재난관리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올해 2월말에는 행정안전부가 상설 독립조사기구의 설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구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설 재난조사기구를 다시 보다
가끔씩 뉴스에서 재난조사기구가 언급되면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겨왔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피게 된 것은 5월 토론회 이후였다. 문재인 정부 1년이 되는 즈음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는 어디쯤 왔는지 짚어보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자로 나온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피해자들이 참여할 제도적 장치”로서 상설 기구의 필요성을 말했다. 이때부터 재난조사기구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도 토론회 자료집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가족이 묻고 유가족이 답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을 리뷰하며 여러 재난참사에서 피해자들이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는 시간도 가졌다.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설 기구의 필요성이 조금씩 더 분명해졌다.
피해자 참여의 중요성에 비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낮은 점이 한국사회에서 큰 문제였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피해자가 조사기구나 조사과정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인권기준은 인권침해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의미 있는 참여’ 없이 진실과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피해자가 참여할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
첫 번째는 피해자와 그 가족이 재난참사의 진상규명을 가장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그 가족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사실을 왜곡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진실’을 원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왜 일어난 것인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죽어간 누군가를 대신해 추측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닿고 싶어 한다. 현실에서 진상규명이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의 주장과 가해자의 주장이 대립하기 때문이 아니다. 진상규명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끝내야 한다는 주장의 대립이 쟁점이다. 피해자의 참여는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향해 계속 갈 가능성을 연다.
피해자들은 진실에 이르기 위한 질문을 가장 많이 품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질문을 사회가 함께 품는 만큼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생존수영이 초중등 교육과정에 들어갔다. 알아서 피하고 살아남기 위한 기술과 훈련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참사로부터 얻은 교훈의 전부라면 참담하다.
춘천 산사태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춘천시의 방해로 직접 진상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산사태가 시작된 곳이 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방공포 진지를 그대로 두다 보니 비가 올 때 물을 머금고 있다가 한꺼번에 밀고 내려와 산사태를 일으킨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이미 유사한 산사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민박집을 허가해주고, 법적으로는 반드시 주인이 거주해야 하지만 법을 어겨도 점검되지 않던 문제도 밝혀냈다. 피해자 가족의 노고 덕분에 우리는 비슷한 재난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참여가 어려우니까 더욱
피해자 참여가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피해자 참여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재난참사의 피해자 가족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실종된 가족을 직접 찾아나서야 했고, 시신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에 난지도 쓰레기장도 뒤져야 했다. 사건의 원인을 적당히 설명하고 넘어가려는 지자체와 경찰의 태도 때문에 전문가를 수소문해야 했고, 사건의 진행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맡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 가족들도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 가족들이 끝까지 싸우는 것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경탄한다. 고맙다고 한다. 동시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당사자이므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멈출 수 없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싸움을 멈추는 피해자 가족들이 더 많다. 진실과 정의에 이를 때까지 싸우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억울해서 못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재난참사를 인권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피해자 가족들이 가장 많이 부딪치는 벽은 ‘보상 더 받기 위해서’라는 편견이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외로운 시간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정부도 법원도 국회도 꿈쩍 않을 것 같을 때 ‘선례’를 넘어설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정신없이 싸우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이 180도 달라져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두려움이 압도하기도 한다. 버티려면 기댈 곳이 필요하다.
스텔라데이지 호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가족이 안아줄 때 느낌이 다르더라. 그게 우리의 또다른 시작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앞선 재난참사 피해자 가족들이 진도로, 국회로 찾아왔던 것도 외로움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할을 피해자 가족들끼리 감당하게 둘 것이 아니라 제도화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댈 수 있는 공식 기구가 필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기구가 되지 않도록
재난조사기구를 ‘조사’ 기구로만 생각할 때는 잘 만들어질까 하는 의문, 잘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기대 정도만 있었다. 5월 토론회를 참여하고 나서, 노란리본인권모임 참여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이제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난조사기구가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을 남기는 행정기관의 역할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진실이 가장 큰 치유라는 배움도 그 중 하나다. 재난참사의 진상조사는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질문을 함께 품고 사회적 교훈을 얻어가는 과정이 애도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재난조사기구는 피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의 권리를 깊이 이해하면서 활동해야 한다. 피해자 가족들이 모이고 기댈 수 있는 자리가 상시적으로 있어야 한다. 노란리본인권모임은 상설 재난조사기구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이어가기 했다. 국회나 정부가 적당히 만들고 아무도 모르는 기구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