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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김용판 무죄판결이야말로 유죄의 증거

‘비정상’ 민주주의를 소망하며

“선거에 개입하거나 사건의 실체를 은폐할 의도, 수사 결과를 허위로 발표할 의사가 없었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내심을 친절하게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재판부의 무죄 판결은 김 전 청장의 유죄가 더욱 심각함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무죄 판결이야말로 유죄의 증거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직원이 ‘댓글 작업’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수서경찰서가 수사에 들어갔다. 5일 후, 대선 3일 전, 경찰은 “국정원 직원의 컴퓨터에 대한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 문재인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비방 댓글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지금은 국정원 직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모두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중 일부는 당시에도 알고 있었고, 일부는 알 수 있었다는 점까지 드러났다. 그래서 김 전 청장이 재판정에 서게 됐다. 

재판부의 판결을 좇아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국정원 직원의 대선 개입 가능성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정원의 존재를 뒤흔들 만한 사안이며, 임박한 대선이 과연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하는 사안이다. 그 수사를 경찰이 맡았다. 그런데 서울청 분석팀은 피의자인 국정원 직원에게 “모든 파일을 다 열어봐야 한다고 설득”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수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몰라도, 이미 국정원 직원이 경찰의 수사에 너무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은 확인된다.

그런데 당시 파견됐던 수사팀원은 “스스로 결정”해서 분석에 참여하지 않고 복귀했다. 수사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경찰력을 조금이라도 더 사용해야 하는 사안을 놓고 분석팀원이 자의로 빠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는 말이다. 수사를 위한 키워드를 축소했다는 등 수사범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키워드 검색 기법을 잘 몰랐고” “분석관들이 (…) 토론을 거쳐 분석범위를 결정”했으므로 경찰의 “경험과 지식에 비춰볼 때” 정당했다고 한다. 즉, 대한민국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들이 경험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정도로 수사에 임했다는 말이다. 김 전 청장은 실체적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찾으려는 비상한 각오도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엄중한 사건인 만큼 경찰이 스스로 충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굳이 서둘러 발표하지 않는 게 상식적이다. 분석관들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얘기가 공개될 때의 파장을 염려”해 CCTV 앞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모든 국민에게 공개하는 중간수사결과 발표의 시기에 대해서는 별 ‘의도’도 ‘의사’도 없었다고 한다. 적절한 시기인지, 적절한 내용인지 검토하는 진지한 회의도, 비상한 결단도 없었다. 수사과정 보고를 “수기 메모나 구두로 하라”며 수사팀도 보안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그저 특정 언론사가 분석상황을 단독 보도한다는 이유 정도라는 것은 또 얼마나 놀라운 결백함인가.


‘정상’적인 것의 결백함

‘국가’의 치안을 담당하는 핵심 공무원이 ‘국가’의 질서가 휘청거릴 수도 있는 사안을 다루면서,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수사해야 할지, 수사 진행과 결과에 대한 보안을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할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뇌하지도, 전전긍긍하지도 않았다. 재판부의 친절한 설명이 밝혀주는 것은 김 전 청장이 사건의 실체를 숨기려는 의도도 가지지 않을 정도로, 이 사건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는 것도, 그걸 수사하는 과정에 국정원 직원이 개입하는 것도, 그에게는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김 전 청장 개인의 국가‘관’을 넘어선다. 재판부는 권은희 과장의 증언이 다른 경찰관들의 증언과 배치된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직급이나 정치 성향 등이 서로 다른 모든 경찰관들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검찰 수사를 받고 법원에서 증언하면서 모의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서로 다른 증인들이 경험하는 사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모의하지 않아도 “진술 상호간에 모순이 없는” 상태가 가능했다면 그것은 경찰 역시 이미 ‘정상’적인 질서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김 전 청장이 굳이 개인적 의도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국가’의 ‘정상’적인 모습은 숨겨질 수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다른 증인들의 진술을 모두 배척하면서까지 권은희의 진술만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맞다. 그러나 재판부가 이 ‘정상’적인 경찰과, 그 경찰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상’적인 국가에 문제를 느꼈다면, 권은희 과장의 진술을 “신빙성 없는” 진술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권은희 과장과 다른 증인들의 진술이 모두 ‘진실’인 이유를 탐문했어야 했다. 결국 재판부는 재판부 자신까지를 포함해 ‘정상’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진실되게 보여주었다. 재판부조차 “경찰의 중간 수사 발표 내용이 시기와 내용 면에 있어서 최선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 수준이었을 뿐, 그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자체가 재판부가 최선을 다해 이 사건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임을 몰랐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했다.


‘정상’의 민주주의를 직시하자

재판부의 판결이 무엇이든,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경찰이 발표한 중간수사결과가 무엇이었든, 중간수사결과를 언제 발표했든,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다 드러났다. 그러나 이 사실들이 ‘정상’에서 벗어난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오히려 이 사실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 선거의 핵심은 공정성,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다. 후보의 공약과 정책이 공정하게 유권자에게 알려지고, 유권자의 선택이 공정하게 집계된 결과에 대한 승복이 민주주의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공정성은 민주주의를 보증하지 않는다. 정당의 공약이나 정책은 선거 기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깜짝 상품이 아니다. 한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따라 오래 동안 주조되는 숙성 상품이다. 더 견고하게 다져진 물질적 조건을 누리고 주류 이데올로기에 더욱 친화적인 정치세력일수록 유리하다. 오히려 이런 배경을 삭제하는 것이 공정성의 환상이다. 게다가 유권자의 선택이란 언제나 기존의 관계에 붙들려 있다. 자신의 생활세계와 무관하게 투표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해석, 온․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주위 사람들의 선택,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 후보의 특징에 대한 호불호 등 모든 것이 투표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유권자의 투표성향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사건은 ‘선거결과의 왜곡’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새누리당이 선거결과에 불복하겠다는 것이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민주당은 꼼짝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된 문제들을 사법부에 기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사법부나 헌법재판소에서 정치적 의제가 다루어지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때 사법부나 헌재의 역할은 무엇이고 재판의 방식은 어때야 할지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종결이 사법이 되어버리는 ‘정치의 사법화’ 관성은 벗어나야 한다. 찬반 클릭을 수사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유죄라는 판결이 나온다고 민주주의가 한 발이라도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특검 요구는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의 일부일 수 있지만, 전부여서는 안 된다. 국정원이 아니라면 선거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을 되뇌는 것으로는 아무런 정치적 힘도 만들 수 없다.


민주주의를 만들 정치적 힘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러온 정치적 파장이 작지 않았는데도 지금 우리에게 남은 성과는 크지 않다. 국정원의 정치 관여는 금지하지만 댓글 활동은 계속 한다는 개혁안, 사건 관련 주요 책임자에 대한 무죄 판결……. 그리고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고만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우리 스스로 주인 되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는 파괴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힘과 질서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직접선거 민주주의 이상의 민주주의를 꿈꾸지 못해왔을 뿐이다. 그래서 ‘정상’의 민주주의 앞에서 혼란을 겪으며 우리의 힘과 질서를 부를 이름을 잃고 있을 뿐이다.

선거결과에 대한 존중과 복종은 다르다. 선거결과를 통해 드러난 사람들의 열망이 무엇인지,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되묻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존중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은 “우리가 너무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 것 아닌지 반문해 봅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반대다. ‘정상’의 민주주의에 “먹고사는 일”이 없는 것이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키고 만들려는 ‘정상’의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보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말하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하게 겨누는 것이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점을 놓치지 말자.

‘정상’의 세계를 주조하는 국정원의 본질이 드러났다. 그러나 국정원을 개혁하거나 폐지하면 ‘정상’의 세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정상’의 세계가 뒤틀려야 국정원도 흔들린다. ‘정상’의 세계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의 힘을 모아 균열을 내야 한다. 권은희 과장이 ‘정상’적인 경찰기구 안의 ‘비정상’ 인물인 것처럼, 작년 말 철도총파업이 ‘정상’적인 세계의 ‘비정상’ 사태였던 것처럼, 우리 모두 ‘비정상’을 자임해야 할 때다. 그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