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
상임활동가 편지를 참 오랜만에 쓰게 됐어요. 지난번 편지는 겨울이었는데, 짧은 봄과 기나긴 여름이 다 지나갈 즈음 이렇게 다시 한 번 쓰게 되네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휴가를 다녀온 만큼 휴가기간 잠깐 들었던 생각들을 써보고 싶어지네요.
전 이번 휴가에 고향에 다녀왔어요. 처음에는 그래도 휴가인데 친구들이랑 바닷가로 놀러 갈까 아니면 계곡에 놀러 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피서지에서 또 지치게 하는 것보다 고향에 가서 뒹굴뒹굴 거리면 좋겠더라고요. 귀여운 조카들과 뒹굴뒹굴 놀기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구요.
고향집에 내려가니 여전히 그대로이더군요. 정겨운 소파, 방 가득 책 내음을 풍기는 책장, 여전히 그대로인 이불들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반가운 추억도 마주치게 되었고요.
그건 국민학교 때 생활기록부와 성적표였어요. 두꺼운 8절지 종이에 금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그곳에 촌스럽게 새겨진 ‘계림국민학교’란 글귀를 보니 그때 제 모습들이 하나하나 생각나더군요. 매일 학교 끝나면 드넓은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친구들과 롤러장도 가고 방송반 하겠다고 들어갔다가 괜히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학교도 빨리 등교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우습기도 재미있기도 하더라고요.
추억에 젖어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를 보다 보니 장래희망란이 딱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의 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나하나 읽어 보기 시작했고요.
처음 꾸었던 장래희망은 청소부아저씨였어요. 그러다가 변호사, 외교관, 역사학자로 점점 변했구요. 웃음이 나왔던 건 장래 희망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가 아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이런 게 다 빠져 있는 채 그냥 직업만 하나 쓰여 있는 거죠.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가진 장래희망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처럼 어떤 직업이 아닌 장래에 어떻게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어요.
최근에 제가 가진 생각들은 긴 미래보단 바로 앞에 주어진 시간들이었어요. 사랑방 20주년 준비를 하면서 어떤 인권운동을 고민해볼까,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은 앞으로 어떻게 돼야 할까, 혐오관련 모니터링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변두리프로젝트는 빨리 마무리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근데 그곳에서 나는 어디 갔지? 이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어떤 인권운동을 하고 싶지, 어떤 반차별 활동가가 되고 싶은 걸까, 활동가라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이런 생각에 빠져드니 지금의 제 모습들이 떠오르더라구요. 활동을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 않고, 무언가를 하면서도 지쳐있던 모습들이... 내가 꿈꾸는 모습이 있다면 하나하나 만들어가면서 ‘아, 나는 지금 이만큼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한발 한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쳐하고 느슨해져 하루를 살아가기보다 견디고 있는 제가 보이더라고요.
그런 생각들을 한 이후로 요즘 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 물론 잘 만들어지진 않고 여전히 무더위에 지쳐 느슨해진 마음은 꽉 움켜지지도 않고 있지만 조금씩 생각하고 길을 만들다 보면 잘 정리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차근차근^^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멋진 활동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라는 장래희망도 품으면서요. (물론 그 희망엔 “언제나 연애 중”도 있을 것 같아요ㅋㅋ) 언젠가 그런 희망들이 잘 정리되면 사람사랑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드릴게요. 그때까지 제가 잘 생각할 수 있도록 꼭!! 힘을 불어넣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