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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안기부와 인권 ④ 안기부와 선거

선거국면마다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청객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 선거사에 숱한 오명을 남겨온 안기부에게 있어 이번 대선은 명예회복의 기회로 자리할지 아니면 또다시 과거의 오명을 되풀이하는 계기가 될지 자못 주목되는 부분이다.


조선노동당 사건, DJ에 치명타

선거를 앞둔 안기부(또는 중정)의 단골작품은 바로 ‘공안사건’이었다.

67년 6․8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야당(신민당) 전국구 후보인 김재화 씨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일동포 실업인이던 김 씨에게 조총련계 자금이 유입된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신민당 중앙당의 경리장부가 압수되고, 선거자금 등 경비지출도 동결되었다.

결국 한달 전 5․3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선전을 펼친 양상과는 반대로 6․8총선은 야당의 참패로 끝나버렸고, 여당은 개헌선 117석을 훨씬 웃도는 129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69년 대통령 3선개헌으로 이어지는 6․8 총선을 지휘한 것은 중정이었고, 그 책임자는 김형욱이었다.

92년 대통령선거를 3개월 앞두고 발표된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은 ‘6공 안기부의 최대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북한의 고위간부 이선실과 연루됐다는 이 사건은 해방 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라고 발표되면서, 국민의 반공심리를 한껏 자극했으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겐 치명타로 작용했다. 선거후 월간중앙에 실린 92년 김영삼, 김대중 씨에 대한 지지율 추이를 살펴보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 발표되기 직전인 9월 현재 김영삼(21.1%) 씨와 김대중(18.8) 씨 간의 지지율 격차는 3% 포인트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노동당 사건 직후, 김대중 씨에 대한 지지율은 급락했으며 양자간의 지지율은 10% 포인트까지 벌어지게 되었다(YS-23.5%, DJ-13.4).

그 뒤, 93년 2월 24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의 1심 판결은 이 사건이 ‘대선용 과대포장 사건’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재판부는 관련자들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남한조선노동당’이라는 이름은 안기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북한 고위간부인 이선실과의 연관성 여부도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선거는 이미 끝난 뒤였고, 1심판결이 내려진 다음날 김영삼 씨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야당후보 비방유인물 사건

선거시기 중정과 안기부의 역할은 ‘공안바람’을 일으키는 데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 씨와의 박빙승부로 박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71년 4․27 대통령 선거에서 중정의 ‘활약’은 빛을 발했다. 당시 ‘DJ의 제갈공명’으로 불린 조직참모 엄창록(88년 타계) 씨를 회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의 당선을 도운 이래 70년 대통령후보가 될 때까지 DJ의 3선을 가꿔왔던 그가 4․27 대선을 열흘 앞둔 4월 16일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한달 뒤 모습을 나타낸 엄 씨는 “중정에 납치당했다”고 주장했지만, DJ진영은 이를 ‘중정의 회유에 따른 엄 씨의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후 죽는 순간까지 엄 씨가 DJ를 멀리한 사실은 ‘회유’쪽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회유’던 ‘납치’던 엄 씨의 이탈은 대선에서 김대중 씨가 패한 4대 원인 가운데 하나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92년 3․25 총선에선 안기부의 노골적 선거개입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투표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 밤,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 단지에서 선전물을 돌리던 4명의 안기부원들이 야당 선거운동원들에게 붙잡힌 사건이 그것이다. 안기부원들이 뿌리고 다니던 유인물은 야당후보자인 홍사덕(민주당) 씨를 비방하는 흑색선전물이었다. 야당운동원들에게 들통이 나는 바람에 안기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이 지역에선 홍사덕 씨가 김만제(민자당, 현 포철회장) 씨를 전국 최대 표차로 제치고 당선되었다.


문민시대 안기부, 선거개입 여전

김영삼 씨의 문민정부는 93년 안기부법을 개정함으로써 안기부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피력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가면은 예기치 않게 드러난 안기부의 한 비밀문건을 통해 백일하에 벗겨지고 말았다.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안기부가 “지방선거 출마자의 동향을 분석하고 선거의 연기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전국지부장에게 내렸던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덕 통일부총리(비밀문건 작성 당시 안기부장)가 경질되고, 정형근 안기부 제1차장(현 신한국당 의원)도 옷을 벗게 되었다.

지난 96년 4․11 총선은 ‘DMZ 사건’ 등 이른바 ‘북풍’이 여당에 승리를 안겨다 준 선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총선을 통해 정치적 진출을 모색하던 재야운동권은 이미 95년 11월부터 ‘공안’의 된서리를 맞고 있었다. 이른바 ‘간첩 김동식 사건’이 발표됐으며, 이 사건과 관련해 허인회, 우상호, 함운경, 이인영 씨 등 학생운동 출신 청년운동가들이 줄줄이 구속된 것이다. 하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허인회, 박충렬)이 잇따랐던 것은 이 사건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간첩 김동식’ 사건은 여당에겐 호재로, 재야와 야권에겐 타격을 입힌 92년 ‘공안한파’의 복사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올해 대선에서도 안기부의 활약이 펼쳐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중정 이래 중단없던 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을 경험하면서, 국민들은 또다시 안기부의 ‘다음 작품’이 무엇일까 하는 우려를 지우기가 어렵다.

고려대 ‘청년’, 전북지역 대학생 그룹 사건 등 6월 들어 연일 터져나오는 국가보안법 조직사건들도 과거의 악령에 대한 기억을 부추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