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사회권, 국가의 책임방기
한국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이행정도에 대해 유엔에서 2번째 심사가 진행중이다. 제대로 살 권리를 입에 올리기도 힘든 지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모성보호 관련법을 개정하되 시행은 2년 연기한다. 출산휴가를 60일에서 90일로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모성보호 관련법 개정안을 놓고, 민주당 등 여권 3당이 합의한 내용이다. 출산휴가 90일은 ILO 조약 제183호에 명시된 ‘출산휴가는 최소한 14주가 되어야 한다’는 국제적 기준이다.
그러나 시행을 2년 연기한다는 내용은 여성 근로자의 휴가증가로 인한 인건비 상승이 경영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재계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것.
국가가 앞장서서 인권침해
소위 ‘유예조항’은 요즘 들어 그렇게 생소하지 않다. 지난 2월 28일에도 국회가 복수노조허용을 5년 유예했기 때문. 유예란 첨예하게 대립하는 쌍방을 적절한 수준에서 합의하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국가의 책임 방기에는 언제나 사회권 개념에 대한 비틀린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 : 사회권 왜곡하고 호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아래 사회권 조약) 제2조에는 국가가 ‘입법조치를 포함한 모든 적절한 수단에 의하여 이 조약에서 인정한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중략) 자기 나라의 가용자원이 허용하는 최대한도까지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행정관료와 정치인들은 ‘점진적 달성’을 곡해하여 사회권 실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가용자원의 허용한도’라는 허울 아래 경제적 어려움을 앞에 내세운다.
그러나 97년 유엔 인권보고 매뉴얼은 ‘구조조정이나 경제후퇴 등 심각한 자원제약의 시기에도, 대상을 명확히 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계획을 채택하여 사회의 취약한 구성원들은 보호될 수 있으며, 사실상 보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권의 완전한 실현이 짧은 시간 내에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내용적 의무가 없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모성보호 관련법 시행을 2년 연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현실 속에 안주하여 ‘모든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지 않은 명백한 인권침해 행위이다.
이는 최근 일련의 대우차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우차 부평공장은 지난 2월 16일 노동자 1천7백50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했고, 정부는 “구조조정은 대세”라는 현실론을 내세워 이를 묵인했던 것. 정부가 조금이라도 인권의식이 있었다면, 당시 대우차 노조가 내세웠던 “무급순환휴직의 실시와 적극적인 투자” 등의 독자생존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기본적인 사회권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않아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을 초래했고, 결국 계속해서 집회를 불허하고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함으로써 기본적인 자유권조차 짓밟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차별금지
한편, 사회권은 노동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의식주 및 교육․건강․문화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며, 여성․아동․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권조약 제11조는 사회권의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또한 부단히 생활조건을 향상시킬 권리가 있다. 상당한 생활수준이란 자기와 자기 가족이 쓸 상당한 식량, 의복 및 주택을 그 내용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