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학)는 최근 발간된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재판소라는 '제왕적 사법부'의 등장이 한국 민주주의에 갖는 날카로운 모순을 이렇게 일갈한다.
그의 지적처럼, 지난해 5월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과 10월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 결정으로 시민들의 뇌리 속에 뚜렷이 각인된 헌법재판소라는 존재는 지금 우리에게 중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헌법의 수호자', '민주주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라고 일컫는 헌법재판소라는 권력의 감시자는 과연 누가 감시하고 통제할 것인가. '사법독재'를 통제하기 위해 인민의 정치적 권리는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헌법재판소는 무엇인가
지난해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이는 그를 선출했던 인민이 아니라,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되지 않은 9명의 헌재 판관들이었다.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한순간에 무효화된 것도 이들 헌재 재판관에 의해서였다. 심지어 헌재는 후자의 결정에서 헌법 '해석'을 넘어,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로 한다'는 새로운 헌법 규정을 '창설'하기까지 했다.
이 두 결정은 헌재의 권력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그리고 바로 그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민의 정치적 권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특히 후자의 결정을 두고 '사법 쿠데타를 통한 주권 찬탈', '사법독재 시대의 도래'라는 비판과 우려가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헌재는 법률의 위헌여부, 헌법소원, 탄핵, 정당해산, 권한쟁의에 관한 최종 심판권 등 핵심 권력을 갖고 있다. 대통령 임명 3인, 국회 선임 3인, 대법원장 지명 3인으로 구성되는 헌재 재판관은 국회 재적의원 1/3의 발의와 과반수의 동의에 의해서만 탄핵될 수 있으며, 탄핵에 대한 최종 심판권은 다시 헌재에 있다. 한마디로 헌재는 선출되지도, 심판받지도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셈이다. 이렇듯 인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와 가장 거리가 먼 몇 명의 엘리트에게 '헌법수호자'의 권한을 부여하는 '귀족주의'적 통치체제가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게 될 것은 말할 나위없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나 인권에 직결된 중대 사안들이 앞다투어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리고, 고명하신 재판관들의 '하문'을 기다리는 방식이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데 있다.
왜 헌법재판소로 몰려가나
1988년 9월 설치 이후 헌재에 접수되는 사건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88년 당시 39건에 불과했던 접수 건수는 2003년 1163건으로 상승했다. 초기에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헌법소원이 주로 제기되었던 반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이른바 정치권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들고 헌재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헌법은 문서 속에서 걸어나와 정치와 시민의 일상을 규율하는 근본규범이자 제도로서 작동하기 시작했고, 헌재의 권력 역시 무한대로 비대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87년 민주화 이후 정치 분파간 세력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의 교착상태에 따른 의회의 위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정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민감한 사안들을 헌법문제로 쟁점화하면서, '중립성'의 외피를 쓰고 있는 헌재에 중재자의 역할을 떠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순옥 교수(인하대 법학)는 지난해 10월 <대안헌법이론> 강연에서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서 다시 권위주의적 법치국가로 이어지는 법치국가 발전의 최종 단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면서, "권위주의적 법치국가에 이르면, 법치국가는 헌법재판국가의 옷으로 갈아입고 민주주의와 대치하게 된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이 주장에 비추어볼 때,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공존하는 시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면서 권위주의적 법치주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대한 환상 거둬들여야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헌재에 대한 통제 노력이 체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은 헌재가 87년 민주화 투쟁의 성과라는 '상징의 과잉', 그리고 헌재로부터 나온 몇몇 전향적인 결정이 헌재의 보수적 결정을 가려온 '선택적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헌재는 87년 민주화 항쟁이 낳은 헌법 개정 국면에서 설치가 결정됐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반민주악법의 개폐를 주요 요구 사항으로 내걸었을 뿐, 헌재는 여야 대표들의 막후 정치협상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비록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견제 장치의 하나로서 헌재가 도입되었다 해도, 헌재가 마치 사회적 합의와 투쟁을 통해 쟁취된 산물인 것처럼 과잉 상징화되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최장집 역시 앞의 글에서 이렇게 되짚는다. "실제 민주 헌법으로의 개정은, 민주화운동 세력들의 이렇다 할 개입이나 압력 없이, 또한 이슈에 대한 광범한 사회적 논의 없이 구체제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민주화와 더불어 부상한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 주요 정파들의 몇 안 되는 대표들 사이의 비공개 정치협상에서 타협을 통해 만들어졌다."
나아가 그동안 헌재가 영화 사전심의제도 위헌 결정, 최근의 호주제 위헌 결정과 같은 몇몇 전향적 결정을 내놓기는 했지만, '좋았던 결정'에 대한 선명한 각인이 헌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흐리게 만들고 헌재에 대한 총체적 판단도 가로막아 왔다. 실제 헌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권침해의 주범으로 꼽혀 왔던 국가보안법, 준법서약서, 사형제도, 병역법 등에 지속적으로 합헌 결정을 내려왔으며, 특히 노동자와 빈민 등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는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까운 보기로 지난해 8월 국가보안법과 병역법 합헌 결정, 그리고 그 해 10월 장애인 가족이 제기한 최저생계비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 기각 결정이 대표적이다. 반면 헌재는 89년 토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토지초과이득세법 헌법불합치 결정, 택지소유상한법 위헌 결정 등 가진자들의 '재산권'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 왔다. '헌법정신'의 이름으로 헌재는 인권을 억압하는 제도를 정당화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볼 때, 운동사회는 헌법해석의 재량권이 헌재 재판관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현실, 나아가 헌재가 헌법 창설권까지 자처하고 있는 이 현실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 무엇보다 헌재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르웨이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사법부의 법률 심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헌재와 같은 존재나 권한의 부재가 이들 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근본 원인으로 꼽히지는 않고 있다.
헌재를 인민주권의 테두리 안으로
우선은 헌재를 어떻게 인민주권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헌재가 갖는 위험성이 인식되면서 일각에서는 모든 헌재 재판관에 대한 인사청문제 도입을 요구하는 한편, 법관들 이외에 헌법에 대한 전문성과 사회적 다원성을 고려한 재판관 선출 등 구성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도 물론 의미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헌재를 인민의 직접 통제 하에 두기 위한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대통령 직선을 이미 1871년 파리코뮌에서 파리의 인민들은 모든 사법권력에 대한 직접 선출권과 소환권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민주주의와 사법부, 인민의 정치적 권리와 헌재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여는 하나의 모색일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재판관이 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헌법을 만드느냐에 있다. 헌법은 재판관들이 잘만 해석하면 되는, 자기완결적인 가치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과 헌법은 역사적 투쟁의 산물이고, 인민은 헌법에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인 인권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대통령 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한 개헌론이 부상하고 있고, 헌법 연구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다가올 개헌 국면을 정치권에게만 맡겨두어서는 안된다. 이번 개헌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헌법을 새로 쓰는 과정이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헌재 권력에 대한 통제 방안도 중요한 과제로 자리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