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개발의 첫 단계는 조용히 지나간다. 형식적인 ‘주민설명회’와 주민 대부분이 모르고 지나가는 ‘주민공람 및 이의신청’ 기간(30일)이 지나면, 주민들의 별다른 동의 없이도 지자체가 독단적으로 ‘정비구역 지정 신청’을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개발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결정임에도, 정작 주민들에게 필요한 ‘정확한 정보와 선택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개발 초기 단계에서 쉽게 간과하고 지나가는 ‘조용한 인권침해’는 나중에 곪을 대로 곪은 상태에서 용산참사와 같은 ‘끔찍한 인권침해’로 드러나게 된다.
지난 4월 30일 손기정기념관에서는 이 ‘조용한 인권침해’에 저항하는 작지만 중요한 모임이 열렸다. 인권운동사랑방(서울 중구 중림동 소재)이 중림동 이웃 주민들과 함께 ‘구청이 말하지 않는 개발의 실제’를 나누고자 준비한 모임이었다. 이날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도 30명 가량의 주민들이 모여, 북아현 뉴타운 지역 주민의 증언과 개발 분야 전문가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 후에는, 오는 5~6월에 일방적으로 ‘정비구역 지정 신청’을 예정하고 있는 중구청에 주민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오갔다.
자력재개발을 한 지 30년도 안돼서 또 개발?
마을 원로 김례복 씨는 여는 말에서, 불과 20~30년 전 자력재개발을 할 당시 징수금문제 때문에 중구청장을 찾아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고생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구청이 또다시 이 지역을 개발하려고 한다. 시멘트 벽돌로 지은 집은 보통 50~100년은 간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중구청의 탁상 행정을 비판했다.
김례복 씨는 또 “얼마 전 문화방송(MBC) 피디수첩을 보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 2억 원씩을 더 부담해야 하더라. 미아리 쪽은 주민들 중에 17%만 아파트에 입주하고, 그 중에서도 10%는 또 나간다고 한다. 우리 중에 그만한 (돈이) 준비가 된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면서, 무작정 개발을 추진하기 전에 주민 전체가 모여서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실상을 정확하게 알고 적극적으로 의견 표출해야
다음으로는, 북아현 뉴타운 1-3구역에서 비상대책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는 이준호 씨가 바로 옆 동네에서 겪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준호 씨는 “저희 동네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잘 모르고 동의서를 찍어주는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다 감정평가가 발표되고 나니 주민 분들이 반대로 뒤돌아섰다.”면서, 개발의 초기 단계부터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개발에 반대한다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준호 씨는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추진위, 조합 설립) 동의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주변에 알린다면 사업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면서도, 북아현 구역에서 동의서 600장 중 170장 가량이 위조된 사례를 들면서, “조합에서는 이러한 범죄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사업을 강행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안양시청 등에서는 사업성 분석에 기초해 정보 제공한 사례 있어
이날 강사로 초청된 도시정비업체 J&K(제이앤케이) 대표 백준 씨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의 진행절차와 재산가액이 결정되는 방법 등에 대해 강연했다.
백준 씨는 사업 진행 절차를 설명하며, 특히 “이번부터는 공공관리제도에 의해 예비추진위원장 선거가 이루어져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전에는 그나마 과반수의 동의서를 얻기 전까지는 어느 한 추진위원회가 힘을 얻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과 20~30%의 투표율로 치러진 선거에서 예비추진위원장이 당선되면 (사실상 극소수의 지지만으로도) 공공기관에서 인정한 대표로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백준 씨는 또 조합원 권리가액은 분양수입에 사업비를 빼면 구할 수 있다면서, “2000년대 상반기까지는 주택이 모자랐기 때문에 설사 아파트에 못 들어가더라도 비싸게 받고 팔 수 있었다. 그러나 요 몇 년간 신규 뉴타운 개발지역이 무더기로 지정되면서, 공급이 쏟아져 서울 중심부인 흑석뉴타운마저 미분양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더 이상 분양수입으로 이익을 얻기 힘들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개발만 하면 이익을 얻게 될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백준 씨는 “안양시청에서는 만안뉴타운 각 구역의 사업성을 분석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주민들에게 찬반의사를 물어 뉴타운을 해제한 사례가 있다. 실제로 사업성 분석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 지자체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라면서, “제대로 된 행정이라면 (구역을 지정할 때) 형식적인 설문조사를 할 것이 아니라 사업성 분석에 기초해서 주민 전체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 후에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주민이, 중구청이 추진하려고 하는 ‘역세권 시프트 사업’이 무엇인지 물어왔다. 이에 대해 백준 씨는, “장기전세주택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용적률을 늘려주는 것인데 그만큼 높게 짓는다 하더라도 장기전세주택으로 공급해야 하는 비율이나 최근 거의 미분양인 상가 비율을 감안하면 딱히 나을 게 없다.”라고 대답했다.
임시 대표 선출, 지속적인 모임으로 이어가기로
강연을 마친 후, 주민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앞으로의 대응 활동을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즉석에서 지역 주민들의 추천을 받은 박영복 씨가 주민모임의 임시 대표로 선출되었다. 임시 대표로 선출된 박영복 씨는 “혼자서는 못하니까 지역적으로 체계를 만들어 같이 활동해야 한다. 골목마다 한 명씩 나서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하였다. 박영복 씨의 제안으로 동네 별로 연락을 맡고 힘을 모을 주민들이 자원하거나 추천되었다. 주민들은 앞으로 중구청에 주민들의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지속적인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최근 서울시내 뉴타운 등 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사업이 추진되는 지역에서 주민들의 반발이 점차 커지고 있다. 개발을 하기만 하면 이익이 된다는 환상이 깨진 지는 오래됐다. 그러나 여전히 현장에서는 개발을 추진하려는 일부 주민들과 지자체, 그 뒤에 있을 시공사들이 동네를 들쑤시고 있다. 중림동도 주민들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바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아직 세입자들의 관심이 높은 편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영업하고 있는 장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결정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주민들의 입장을 모을 수 있는 절차가 보장될 것인가다. 오는 5~6월 중구청이 ‘정비구역 지정 신청’을 예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움직임이 중구청의 독단적인 행정을 막아설 수 있을지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볼 일이다. 이 움직임에 조그만 힘을 보태주실 분들은 ‘우리동네’(uridong.net)로 오시길…….
덧붙임
강민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