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한 사람에게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접근한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국정원의 프락치(정보원) 제안을 받아들인다. 가방 안감에 녹음기를 감추고, 자취방 구석에 카메라를 설치한 채,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주체사상 교육까지 받아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6년 전에도 국정원의 표적이 되었던 세력의 잔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영화의 시놉시스가 아니다. 1970년대 유신 시절의 이야기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간 이어졌던 공안 정국의 이야기도 아니다. 2019년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정원은 그대로
국정원이 2014년부터 최근까지 5년에 걸쳐 프락치를 통해 정보를 수집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신의 A가 국정원의 지시에 따라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대가를 받았다고 제보한 것이다. 국정원의 지시에는 민간인에 대한 도청과 불법 촬영은 물론, 사찰 대상으로부터 ‘불온한 발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구체적 행동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정권이 교체되고 대통령의 입으로 국정원 개혁이 천명되었으나, 국정원의 사찰 지시는 달라지지 않았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A가 사찰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으나 국정원은 회유와 협박으로 막았다. A가 위 사항들을 언론에 제보한 이후에도 국정원은 “국가보안법에 따른 정당한 내사”라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국정원이 펼쳐온 ‘정당한 내사’는 어떤 식이었을까. 2000년대 초 국정원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감청이 폭로되었을 때도,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블랙리스트를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작성했을 때도, 국정원은 대공수사를 위한 정당한 내사였음을 피력했다. 그러나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인 수사를 개시할 수 있을 정도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함’이라는 내사의 일반적 목표와는 달리, 국정원의 내사는 주로 ‘특정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특히 대공수사가 ‘국가보안법이 규정하는 좌익사범을 체포하기 위한 수사’임을 내세워 시민들의 말을 수집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을 검열해온 국정원의 ‘부당한 행태’는 언제나 ‘정당한 내사’라는 말로 감춰져왔다.
국정원 개혁이 멈춘 자리
2016년 촛불을 거치며 ‘적폐 청산’과 ‘사회 개혁’은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 중에는 국가 정보기관이라는 명목 하에 폐쇄적 권한을 유지해온 국정원 개혁에 대한 목소리도 있었다. 내국인에 대한 사찰이나 감시 등을 통한 국내 정치 개입 금지,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회를 통한 감시 시스템 확립, 국정원이 소유한 대공수사권 이관 등이 국정원 개혁의 이름으로 요구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 후보 시절부터 국정원 개혁에 대한 의지를 밝혀왔다. 이렇듯 촛불의 요구와 정권의 화답을 받아 전진하는 듯 보였던 국정원 개혁은 어디에서 멈춘 것일까.
대공수사권 이관은 지난 2017년 활동했던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의 권고 사항과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개혁안에도 담겨 있던 내용이다. 그러나 국정원 개혁안이 제출된 지 2년 가까이 지나도록 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대공수사의 개시 권한을 국정원이 그대로 가지는 내용이나 3년의 유예 기간을 두는 안 등이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국정원이 국내 정보 수집부서를 폐지했다고 직접 발표했지만, 대공수사라는 명목 하에 국내 정보 수집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 국내 정보와 국외 정보라는 임의적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대북 정보전 등의 명분만 있으면 언제든지 국내 민간인 사찰은 가능했다. 이번 사건의 심각성은 단순히 국정원이 시대착오적으로 프락치를 통해 사찰을 진행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부터 공안 사건 조작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온 국정원이, 촛불을 거치며 반성하는 모양새만 취한 채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국정원의 토대, 국가보안법
돈으로 매수한 프락치 잠입, 불법의 소지가 있는 녹취 및 녹화, 특정 조직에 대한 탄압, 노골적인 조작 시도 등. 이번 사건은 6년 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및 통합진보당 해산 사태와 유사한 점이 굉장히 많다. 2013년 내란음모 사건 당시에도 조작을 호소하는 목소리, 조사 과정의 인권 침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높았다. 이후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해 대법원은 “녹취록이 국정원에 의해 조작되었으며, RO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국정원에 의한 조작과 표적 수사는 가능성이 아니라 사실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같은 2013년, 국정원은 탈북민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 혐의로 기소한다. 이 사건 역시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이 제출한 주요 증거인 중국 공문서가 국정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마찬가지로 주요 증거였던 피고인 여동생의 증언 역시 국정원의 강압적 수사에 의한 허위였다고 밝혀졌다. 이외에도 수많은 조작간첩 역시 국정원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피해자들의 삶은 파괴되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인권침해실태조사 보고서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서 공안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국정원은 조직 정비나 제도 개선만으로 개혁될 수 없다. 국정원의 법적 기반이자 사상적 배경인 국가보안법이 건재한 이상 국정원은 언제든 민간인 사찰과 조작간첩 만들기를 반복할 수 있다. 1948년 한시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이후 70여 년간 ‘좌익 세력’, ‘종북 세력’ 등 실체가 모호한 적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몸집을 키워왔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의 공안 정국 하에 만들어진 조작 사건의 피해자 다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이후에 조작 사실과 피고인의 무죄가 밝혀지더라도 국정원은 멈추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사건이 더 많을수록 국정원의 필요성도 더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국정원에 의한 공안 조작 사건은 반복되어왔다.
국정원은 변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정권 교체 이후 예전과 같은 공안 정국은 없을 것이라거나,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 등 인권 침해는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또한 국정원은 그 스스로 국내 정치와 절연하고 순수한 정보기관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여전히 국정원은 정보원 잠입을 통한 국내 민간인 사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번 국정원 프락치 사건은 이전 정권에서 있었던 국정원의 공안 조작 사건, 그리고 국정원의 토대를 이루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문재인 정부가 침묵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한지 2년이 넘도록 공안 조작 사건의 피해자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답하지 않고 있으며,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라는 토대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국정원은 앞으로도 변할 수 없다.
이석기 전 국회의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내란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으나 내란을 선동했다”고 판결한 대법원,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서 “자유민주주의 정당부터 공산주의 정당까지 모두 문제 삼을 수 없지만 북한식 사회주의는 안 된다”고 판결한 헌법재판소. 2013년 이후 이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정권 교체와 남북 관계의 변화 등 외적 변화는 충분히 차고 넘친다. 그러나 여전히 건재한 국가보안법의 자장 안에서 국정원의 대공 수사와 공안 조작 사건 만들기는 변하지 않고 있다. 국정원이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 혹은 과거에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게 될까. 문재인 정부가 정말 국정원 개혁을 원한다면 이번 국정원 프락치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동시에, 과거 국정원의 공안 조작 사건과 그 뿌리인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정부가 말하는 국정원 개혁의 방향이 바로 그 입장에서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