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서울시는 ‘외국인 노동자’를 특정한 코로나19 진단검사 행정명령을 고시했다. 차별이라는 문제제기가 빗발치면서 이틀만인 19일 서울시는 행정명령을 변경했다. 강제처분을 ‘권고’로 바꾼 것이다. 이어진 며칠 동안 방역당국에서부터 국무총리까지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이토록 빠른 시정이라니. 최근 활동을 하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였다. 어쩌면 바꾼 것이 없어서 가능한 속도였는지도 모른다.
차별, 빠른 시인과 더딘 이해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놀랐다. 행정당국은 생각보다 훨씬 비합리적이었다. 서울시가 3월 19일에 낸 행정명령 FAQ는 아주 친절하게 검사 대상을 설명한다. ‘외국인 노동자’라면 프리랜서도, 재택근무 중에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거나, 한국 국적을 가진 이중 국적자는 검사대상이 아닌데 한국 국적을 상실한 외국 국적 취득자는 검사 대상이라는 설명을 읽다 보면 정말 국적 자체를 감염의 위험 요인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행정당국은 무엇이 차별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미 행정명령 시효가 끝난 많은 지자체들은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전수검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치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구시는 2차 행정명령을 고시했다(3.19). 대구의 이주인권단체들이 항의를 하자 내외국인이 동시에 검사를 받도록 행정명령을 변경했다(3.24). 그런데 대상 사업장이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장이다. 같은 사업장에서 ‘외국인만’ 검사 받게 하면 ‘차별’인데,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장만’ 검사 받도록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닐까?
서울시와 방역당국이 변화하는 듯 보였지만 대응을 멈출 수 없었다. 이주인권단체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가 함께 모여 공동성명 발표 등 활동을 이어갔다.
오해와 이해 사이
4월 1일 중앙사고수습본부와 면담을 했다. 방역당국의 공무원들은 세종까지 찾아간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분위기였고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를 특별히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3월 29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도 같은 관점이다. 행정명령은 “외국인을 위한 검사 원활화 조치나 편의”였는데 차별로 ‘오해’받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편의’를 위해 ‘명령’을 발동하는 일이 ‘내국인’에게도 가능할까? 예를 들어,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빈발할 때 편의를 위해 모든 개신교 신자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상상 밖의 일이다. 이주노동자를 대상집단으로 행정명령을 내린 것은 행정당국의 ‘편의’를 위한 차별이었을 뿐이다.
정작 감염에 취약한 이주노동자의 환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고용노동부와 법무부, 각 지자체가 이주노동자의 숙소와 사업장에 대한 현장점검을 실시했지만 점검만 할 뿐 개선은 없었다. 아프면 쉬고, 증상이 있으면 검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장은 그대로다. 이유 없이 강제로 검사 ‘당할’ 기회는 제공되지만 필요해서 검사 ‘받을’ 기회는 여전히 멀리 있다.
차별의 깊은 심연
4월 2일에는 <긴급점검! 코로나19와 인종차별> 토론회를 열었다. 코로나19와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은 ‘차별’이라는 말로 다 담기에 부족해보였다. 고용허가제 하에서 고용주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보니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는 손쉽게 제한 당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사업장 밖 출입을 금지시키는 정도는 다반사였고 더 심각한 사례도 있었다. 전북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가 만성비염 증상 악화를 호소하며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자 사업주는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아오라고 했다. 노동자가 보건소를 다녀오니 방에 가두고 ‘코로나19 자가격리,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써붙였다고 한다. 다음날 저녁 3년 동안 일하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이주노동자는 풀려날 수 있었다. 안동의 한 공장에서는 광주에 다녀온 이주노동자를 기숙사에서 14일 동안 자가격리 시켰다고 한다. 방역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감금이었다.
행정명령의 차별만 보면서 대응 활동을 하던 나도 현실을 너무 몰랐다.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차별’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깨달았다. 행정명령을 철회하면 차별도 철회될 것처럼 믿었던 방역당국이나, 미등록 이주민에게 추방하지 않는다고 홍보만 하면 검사를 받으러 오리라 믿었던 법무부보다 아주 조금은 더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라는 정체성 너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과 삶에 대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차별의 심연을 함께 건너기
그러나 알 수 없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차별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질문이 시작되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두려울 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나요? 검사가 필요할 때 선별진료소에 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이주노동자를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코로나19 방역의 주체로 대우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주노동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해하는 것보다 ‘이주노동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함께 서는 것이 차별의 심연을 함께 건널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