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누구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 손해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 국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국가가 불법행위로 국민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배상해야 한다. 국가가 배상하지 않겠다고 부득부득 우긴다면 손해를 입은 국민이 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를 배상하라며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정당한 권리라니! ‘임금님’과 ‘각하’는 천인공노하시겠지만, 전봉준과 유관순, 그리고 김주열과 이한열의 후예들인 국민들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밖에!
군인과 경찰은 제외!
그럼, 매년 100여명 이상씩 죽어가는 군인들의 유족도 죽음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며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걸 수 있을까? 헌법의 답은 헌법 제29조 제②항이다.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 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할 수 없다니, 반전이다. 다른 국민은 다 되는데,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은 안된다고? 그럼, ②항에 따라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고, ①항에 따라 책임만 지란 말인가? 차별 아닌가? 이런 일에는 짠돌이로 변신하는 국가가 보상을 왕창 해줄 리도 없고, ‘법률이 정하는 보상’이 너무 적으면 어쩌나?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건가? 현재로서는 그렇다. 이 조항에 터 잡아 국가배상법 제2조 단서가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군에 입대해 고참들의 족구시합을 구경하다 웃었다는 이유로 맞아 죽은 일병 전○○(대법, 91다14888), 분실한 보급품을 찾아보라는 지시에 잘 따르지 않아 삽으로 맞아 사망한 일병 허○○(대법, 93다29969),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분대장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전투경찰순경 이경 최○○(대법, 94다25414), 이들 모두의 가족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그 외 수많은 군인, 경찰도 마찬가지다. 이런 탓에 공익근무요원과 경비교도대는 군인도 경찰공무원도 아니기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고맙기만 하다(대법, 97다45914). 직무집행의 범위를 제한해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의 범위를 넓히려는 판결은 더더욱 고맙다(대법, 88다카4222).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다.
박정희의 유산과 87년 개헌의 실수
그럼, 국가배상법 제2조 단서조항을 헌법재판소에 헌법에 반한다고 심판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불가능하다. 앞서 본 것처럼 헌법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 헌법 제29조 제②항에 대해 위헌심판을 청구하면 어떨까? 역시 불가능하다. 헌법의 다른 조항이 제아무리 평등을 외쳐도 그것을 근거로 다른 조항의 위헌을 선언할 수 없다. 헌법 조항들의 사이에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헌재, 2000헌바38).
의문 하나,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박정희다. 애초에는 헌법이 아니라 5.16 쿠데타 이후 제정된 국가배상법에 이러한 제한규정을 두었다. 그런데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당시 위헌법률심판권을 가지고 있던 대법원에 해당 법률의 위헌심판을 청구하자, 대법원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는 분노했고, 찬성한 대법관 모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그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유신헌법을 만들며 명문화해서 위헌시비를 제거해 버렸다. 결과는 성공이다. 젠장, 죽은 자가 산 자를 아직도 지배하는 꼴이다.
의문 둘, 1987년 개헌에서는 왜 내버려 두었을까? 여당은 보훈관계법령에 의하여 보상받은 금액을 감안, 그 차액만 배상할 수 있는 헌법근거 규정을 두자고 한 반면, 야당은 이중배상금지조항을 완전 히 삭제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각각 제출했지만, 어쩐 일인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원래대로 존치되었다. ‘이봐요, 대통령 직선제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도 중요하잖아요.’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전일병, 허일병, 최이경, 그리고 각자의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었고, 손해배상청구를 두려워할 필요 없는 국가는 이전처럼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향토예비군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만일, 어뢰가 아니라면....
정부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어뢰 등 외부충격이라고 발표한 이후, 극우족벌언론은 007시리즈 작가도 울고 갈 3류 소설을 써대며 북한의 공격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그럴 수 있다. 북한 잠수부가 미사일을 조정해서 침몰시켰을 수도 있고,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어뢰를 북한이 개발해서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정말이지 만에 하나 외부 충격에 의한 침몰이 아니라면, 혹여 선박의 노후, 정비 불량, 무리한 항해, 지휘관의 실수로 인해 침몰한 것이라면, 어찌 되는 건가? 그리하여 교전 중 전사한 것이 아니게 된다면 어찌 되는 건가? 요컨대, 이 거대한 비극이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어찌 되는 건가? 역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다. 헌법 제29조 제②항과 국가배상법 제2조 단서조항에서 말하는 군인이기 때문이다.
개헌까지는 아니라도
개헌이 필요할까?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다. 그건 무책임하다. 슬프지만 어제와 오늘 그리고 개헌 전의 내일까지 무수히 많은 전일병, 허일병, 최이경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성금과 공무원들 사이의 갹출로 대신하면 안 되나? 그것도 부당하다.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나아가 그것은 국가의 책임을 다른 국민에게 전가하고 생색은 국가가 내는 야비한 행동일 뿐이다.
그럼 어쩌지? 헌법 제29조 제②항을 국가가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향토예비군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어떨까? 요컨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충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잘못에 의해 발생한 손해라면 본래의 보상 이외에 손해배상을 갈음하는 특별한 보상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법률과 시행령을 만드는 거다.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문제지만, 돈에도 의미가 있다면, 국가의 잘못을 배상한다는 의미가 충분히 반영되는 돈이 되도록 국가배상법과 시행령 일부를 하루 빨리 개선하자.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이 아무리 공복(公僕)이라지만, 진짜 종(僕)은 아니지 않는가?
덧붙임
J 님은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LDS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