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미루고 미루던 겨울옷 정리를 했습니다. 여기저기 걸려있던 계절별 옷들도 잘 분류해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세탁소에 겨울외투 한아름을 맡겼습니다. 2월 말에 이사를 했는데, 이제야 이사가 끝난 것 같습니다. 기분이 날아갈 듯 해 거실에 누워 뒹굴고 있었는데, 벨이 울립니다. 아래층이랍니다. 위에서 물이 새는지 천정 벽지가 젖었다고 합니다. 제 마음도 젖어듭니다. ㅠㅠ 누수 탐지하는 분을 불러서 물이 새는 난방 파이프를 수리했습니다. 하지만 물에 푹 젖은 바닥을 말리려면 한참 걸릴 거라고 합니다. 장판을 걷어내고 침대를 들어내 거실 생활을 시작한 지 1주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은 물난리 이후 두 번째 수재민 생활입니다.

해야 할 일들은 줄줄이 나를 기다리는데, 집이 이 모양이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뭔가 대범하게 마음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쉽지 않네요. 노심초사하는 내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짜증이 나던 차에 문득 대학 때 생각이 났습니다. 과에 자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내 방이 과방처럼 사용되던 때, 집이랑 연락 끊고 학생회실에서 1년 동안 살던 때, 잠시 방을 비운 선배 자취방에 친구들이랑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런 일로 스트레스 받지 않았었는데… 다 지나간 옛일이니 좋은 추억만 남은 걸까요? 젊은 날의 객기였을까요? 맞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쓸데없이 미화되어 기억되는 경향이 있고, 분명 당시 저는 외부환경에 덜 민감한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할 때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분명 예전만한 집중력이 없는 게 가장 크게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집중력이라고 표현되는 그 무엇이 제 생활 전반을 잘 조율해왔던 힘이었는데 그게 약해지니 제 주변을 둘러싼 여러 상황, 관계들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저에게로 달려드는 모양새입니다. 대학 때 겪었던 주거환경이 저에게는 별 문제가 아닐 수 있었던 집중력, 운동의 매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활동가로 살아가는 게 익숙해졌다고 할까요? 한때의 경험으로 접하는 활동이 아니라, 앞으로 활동가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익숙해지는 것도 필요할 테지만, 지금 저에게 익숙함은 운동, 활동이 제 주변의 여러 일상 중 하나로 그냥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물이 새면 그 스트레스에 사랑방 활동도 줄줄 샙니다.

사랑방 운동원칙에는 ‘우리는 생계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상근활동가로 자신을 규정짓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운동 자신의 삶의 과제이자 필수요소이므로 어떤 조건에서든 운동할 수 있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돈 벌려고 사랑방 활동을 하는 건 아니라고 이해했는데, 지금 저에게는 운동이 그냥 일상을 영위하는 ‘일’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구절로 읽힙니다. 운동이 제 삶의 과제이자 필수요소가 되는 것, 어떤 조건에서든 운동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다는 건, 운동이 집회 나가고, 성명서 쓰고 회의하고 선전물 뿌리는 그렇고 그런 일상으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온 몸을 던져 투쟁하는 사람들처럼, 저도 지금과는 다른 일상을 되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훈창 활동가의 상임편지를 보고서 김목인의 노래를 몇 개 듣다가 ‘음악가, 음악가란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곡을 듣게 되었습니다. 노래 제목과 같은 물음을 반복하면서 다음과 같은 답들을 스스로 하는 곡입니다. 왠지 활동가라고 바꿔 불러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듯 합니다^^

음악가, 음악가란 직업은 무엇인가.

매년 일정 비율로 태어나는지 음악의 아이들은 계속 나타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비밀스런 자기만의 윤리를 지키고 살아간다.

누구나 좋아하지만, 누구나 집안에 들여놓고 싶어 하진 않는다.

이 직업은 세계 어디에 가도 알아보는 전지구적 연줄을 자랑한다.

엄청난 어려움에도 위대하고 아름다운 교향곡들을 남겨왔다.

이 직업은 가장 오래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모든 곳에 음악이 사용되어도 모든 계획에 음악이 고려되진 않는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직업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마냥 즐겁게만 본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직업에도 사명이 있지만 마냥 무책임하게 본다.

무수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은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음악가의 시간들은 돈으로 계산되지 않지만 엄격한 미소는 요구된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져도 완전히 가격이 매겨지진 않을 것이다.

오랜 어려움에도 살아온 살아있는 화석이다.

현대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야생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