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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복지 너머의 인권

지난 26일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가 연탄불을 피워 생을 마감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이 집주인에게 죄송하다는 메모와 함께 남긴 월세와 공과금 70만원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국가 책임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복지부는 3월 한 달간 복지사각지대에 대한 일제조사를 벌여 긴급지원, 기초생활보장제도, 민간후원과 같은 공공․민간 지원으로 연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들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하거나 정부의 긴급복지지원제도를 알고 있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거라며 기존 복지제도를 국민들이 잘 이용할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정부가 생각하는 복지사각지대는 복지제도를 잘 몰라서 이용 못했던 국민들을 가리키고, 이의 해소를 위해서 복지대상자를 발굴하고 홍보를 강화하는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였을까?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구현하고 홍보를 강화하면 해결 가능한 문제였을까? 복지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현행 복지제도로는 세 모녀가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부양의무제, 근로능력유무와 같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 모녀처럼 긴급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답시고 만들어놓은 한시적 긴급지원제도마저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지원이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세 모녀의 경우엔 복지제도의 문제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중요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찾아가 정부 지원 여부를 상담해본 기록이 없다. 심지어 주변 지인이나 남동생과 같은 친인척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집 주인이 말한 바로는 월세를 밀리거나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죽는 순간까지 죄송하다며 월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간 이들의 죽음을 사람들은 더욱 안타까워한다. 이들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의 전통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고, 복지제도에 무임승차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던 사람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들도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세 모녀는 사회복지공무원의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반겼을까? 이웃과 공동체의 따뜻한 관심에 목말라 했을까? 자원봉사자, 교회, 동네 친목회 등에서 이들을 관심 있게 지켜봤으면 이들이 행복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세 모녀는 몸과 마음이 허락하는 한 성실하게 세상을 살았을 것이다. 남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지를 입증하거나 전시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회복지공무원이 이들을 ‘발굴’해내 상담을 하더라도 이들에게 자신들이 정말 근로능력이 없음을 입증해야 하고, 실제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비참하고 비루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은 정말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들 민관협력 강조하며 이야기하는 교회, 사회적 기업, 마을공동체와 같은 민간자원과 이들 모녀는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더라도 동정과 시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계를 진심으로 환대했을 리 없다.


세상 물정에 밝아서 각종 자원을 잘 이용할 정도로 영리하지 않지만,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온 이들에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그 누구라도. 함께 이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존엄한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부여한 권리인 사회권이 복지 수급권이 아닌, 진정 당당한 권리였다면, 세 모녀의 삶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작은 딸의 메모에 적혀 있다던 ‘비참하군......그런데 언제는 비참하지 않았나.....’라는 말은 우리에게 복지 그 너머의 인권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