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사랑방 외에도 활동하는 공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은평구를 기반으로 의료돌봄기관을 운영하면서 지역주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을 펼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인데요. 그곳에서 만나 절친이 된 레이 님을 후원인 인터뷰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제가 모르던 레이 님과 사랑방과의 인연이 등장해서 저도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낮에는 평범하게 일반 직장을 다니면서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고 있고요. 평소에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활동조합원이자 이사로서 건강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이바지하며 살고 있는 레이입니다.
직업은 간호사이시잖아요. 직장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큰 사회복지법인이 있는데, 그곳에서 운영하는 재활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대부분 뇌성마비나 발달장애인 소아 환자들이 집중적인 재활치료, 물리치료나 심리 및 언어 치료들을 받고 있고, 저는 낮 병동에서 그 소아들을 케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소아를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이 많지는 않을 텐데요.
생애주기별로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데 소아 파트는 만 6세 이하까지를 담당해요. 재활의료기관 중에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곳이 많지 않아서 환자들이 전국구에서 오는 편이에요. 그래서 병원 주변에 단기로 집을 구해서 치료를 다니시는 분들도 많이 있고요.
간호사로 일하는 건 어때요? 작년에는 간호사 1인당 환자수 감소를 위한 ‘간호인력인권법안에 대한 국민동의청원도 있었죠.
네, 저도 참여했어요. 갑자기 화가 나는 기억이 떠올랐는데, 몇 년 전에 서울대병원에서 간호사들을 신규 채용하고 나서 예비교육기간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잖아요. 행동하는간호사회에서 나서기도 했고, 사람들이 싸워서 다시 임금을 받기도 했는데요. 저도 처음 입사한 병원이 이른바 업계 대기업인 대학병원이었는데, 교육기간에는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소득이 없었던 기간을 증명하기 위해서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떼어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가 채용됐을 때 1~2개월 교육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병원에서 건강보험 가입을 안 해줬더라구요. 월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4대보험까지…. (웃음) 당시에는 취준생에서 입사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그냥 너무 기뻤거든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시 화가 나네요.
살림에서도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요즘은 총회를 준비하느라 바빠요. 살림 조합원들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을지, 조합원들이 살림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소통과참여위원회’에서 기본적인 활동을 하고요.
살림에서 직원으로 일할 당시에 레이 님이 사랑방에 엽서를 보내신 적이 있어요. 기억하세요?
(엽서를 보며) 제가 살림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조합활동팀으로 옮겼는데, 이건 그때 보낸 것 같아요. 이걸 어떻게 보셨어요? (웃음) 살림이 2012년에 2월에 정식으로 창립했는데, 그해 6월부터 간호사로 일했거든요. 살림과 함께한 지 10년이네요.
사랑방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살면서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때를 정확하게 기억해요. 제가 대학다닐 때 상임월드컵경기장에 있던 홈에버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점거했을 때도 그렇고, 친구들이 연대투쟁 하다가 갇히거나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거나 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당시에 면회 투어를 다녔어요. 경찰서 가서 들여보내 달라고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어떤 분이 ‘경찰이 말 잘 안 들어주고 무시하면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나왔다고 하세요’라고 말해줬죠. 대단한 곳이구나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었죠. 당시 대학가 친구들에게 인권운동사랑방의 이미지는 그런…. (웃음) 박근혜 퇴근 촛불집회 때도 녹색형광조끼를 입고 전경과 싸우던 사랑방 여성 활동가가 있었는데, 뒷모습이 너무 든든하고 멋있었어요.
사랑방에서 하는 활동 중에 특별히 더 관심 가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죠. 작년 국민동의청원 10만행동 할 당시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면서 주변에 연락 안 한 사람 있다면 참여 권유해달라는 거 보면서, 1년에 한 번 연락할까말까 한 친오빠와 새언니에게도 참여해달라고 연락했거든요. 국민동의청원이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방식이기도 한데, 아빠가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하셔서 다 알려드려서 아빠, 엄마도 다 참여하시고요.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 10만명은 정말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성사된 것이었네요.
마지막에 10만명 성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정말 제 트위터 타임라인이 폭발하는 줄 알았어요. 5만 명까지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갈 때의 기쁨이 있다가도 중간에 ‘왜 이렇게 속도가 더디지’ 마음이 가라앉았다가, 마지막에 또 확 치고 올라갈 때 진짜…. 제가 계속 활동해온 활동가도 아닌데, 가슴 뛰는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가 함께 만든 결과여서 다들 함께 가슴이 뛰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2021년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채로 지나갔네요.
물론 법을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의제에 관심은 많지만,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실제 어떤 참여하는 행동을 하기까지 한 단계 넘어서야 하는 게 있잖아요. 저도 살림에서 활동하는 것 외에는 차별금지법 관련해서 ‘내가 뭘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없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걸 넘어서 다른 사람을 조직하는 활동을 하게 했다는 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어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서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 하면서 은평구에도 오시던데, 이제 또 다른 국면에서는 내가 다른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연결고리가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랄까요.
10만행동 때 세웠던 목표를 마치 보고 읽는 듯한 말을 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가 15년은 넘지 않도록 해야겠네요.
제가 대학에서 여성운동을 할 때도 ‘왜 계속 제자리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고, 지금도 여성운동이나 중요한 이슈들이 과거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요. 세상이 진짜 안 변한다고 느낄 때 차별금지법 10만행동 달성이나 사람들이 함께 해낸 경험들을 계속 환기시키지 않으면 다시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계속 이런 경험들을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대선 후보들 보면 너무 욕이 나와서요. (웃음)
마지막으로 사랑방이나 사랑방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에게는 사랑방을 떠올리면 단체보다 몽이라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조직이고, 그래서 사랑방이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기둥 뒤에 공간이 있는 것처럼, 조직 뒤에 사람이 있잖아요. (웃음) 활동하시는 분들이 모쪼록 끼니 잘 챙겨드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서 잘 있어주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