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활동이야기(<다른 세상을 만나고, 만드는 우리>)에서는 '다른 세상을 만나는’ 운동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 12.3 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퇴진’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크게 올려 퍼지는 요구가 되었습니다. ‘윤석열 퇴진’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힘으로 해내고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랑방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단체, 노동운동 및 진보정당운동 단위들이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로 모이게 된 이유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의 희망찬 순간”
퀴어 페미니스트 역사가이자 활동가인 리사 두건의 책 <평등의 몰락>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제가 활동을 하면서 종종 떠올리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이기도 하죠. 대부분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건 바로 정치의 절망적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부연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국회에서 개최된 ‘백골단’ 기자회견은 ‘윤석열 수호’라는 명분 아래, 자기 이익과 욕망을 수호하고자 하는 기성 정치의 몸부림이 어디까지 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통감하며 지적하고 있듯이, 지금의 절망은 윤석열 한 사람에 의해 펼쳐진 것이 아니니까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나라’가 어떻게 가능했고 지탱될 수 있었는지, 수면 아래의 구조와 역동이 매일 폭로되고 있습니다.
절망의 순간은 ‘내란동조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보수 여당이나 정부부처 인사들, 검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숨죽여 기회를 엿보며 세를 구축하고 있던 극우 세력은 이제 마치 한국사회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조차 불사하겠다는 일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권학자 조효제는 지난해 <하룻밤에 한강을 열 번 건너다>를 펴내며 과거를 이상화하고 이를 복원하고자 하는, 특정 집단에 대한 배외주의를 통해 인권을 후퇴시키는 ‘노스탤지어 정치’가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겪는 현시대에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박정희와 이승만에 대한 향수와 숭배, 여성가족부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의 사례도 바로 이러한 정치가 현실에서 힘을 얻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건 새해부터 극우 지지자들을 ‘애국 시민’으로 호명하고 국민으로서의 대표성을 부여하며 선동하는 윤석열의 정치가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익숙한 장면이지요. “어차피 이 나라를 뒤집어야 되니까”라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어 온 극우 세력들은 각기 다른 이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지키기’를 명분으로 다시금 결집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퇴진’이라는 엄중한 시대적 과제 앞에 다른 사회적 의제를 꺼내드는 건 퇴진 운동의 전선을 흐릴 수 있다며, ‘퇴진’에 담긴 사회적 요구를 ‘퇴진’과 분리시키려는 보수언론과 집단들의 우려 아닌 우려 또한 횡행합니다. 한국사회의 깊고 거대한 절망을 매일같이 마주하고 있는 지금, 정치의 희망찬 순간을 발견할 수는 있을까요?
가자, 평등으로!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사회에 분노한 여성들이 현재 광장의 주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양곡법을 내팽개친 윤석열과 거부권의 정치에 트랙터 행진으로 맞선 전봉준 투쟁단, 날마다 지하철에서 이동권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성소수자를 민주주의의 역사적 주체로 가시화하며 퇴진 광장의 무지개존을 만들고 있는 성소수자 운동, 구미 한국 옵티칼 옥상에 올라 외투자본에 맞서 1년 넘게 싸우고 있는 박정혜와 소현숙, 한화 본사 앞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시작한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주말 수십만 명이 모이고 있는 범시민대행진에서, 남태령과 한강진에서 ‘윤석열 퇴진’을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바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나라’를 살아온 억눌린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한국사회가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이들의 목소리고요.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에서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이라는 이름으로 평일 광장을 열었을 때, 그 첫 번째 집회에서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12월 25일 성탄절에 열린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All I want for Christmas is 윤석열 퇴진! - 윤석열 퇴진하고 평등세상으로
하지만 말 그대로 광장은 이질적인 대중이 서로 다른 기대와 희망을 품고 모이는 다층적인 공간이기도 합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만으로,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장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엔 ‘윤석열들’의 나라는 굳건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실로 존재하는 정치의 희망찬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의 전망이 ‘윤석열 퇴진’ 속에서 사라지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윤석열 퇴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평등과 사회적 위기를 방치하고 민주주의 파괴마저 정치의 도구가 된 한국사회를 ‘나중에’가 아닌 지금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고 싶다는 희망- 박근혜 퇴진 이후 정치가 거의 소멸시켜버린 희망을 다시 휘발되게 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 이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바로 지금 우리 운동의 기반이라고 느껴집니다.
국가인권위부터 헌재까지 행진했던 첫 번째, 서울 상경투쟁을 시작한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농성장에서 열린 두 번째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에서는 ‘가자, 평등으로!’를 쉴 새 없이 외쳤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평등’이라는 이상을 취급해 온 방식은 차별과 불평등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특성들을 물화시켜서 긴 정체성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열망을 최대한 가장 협소한 자유주의적 틀 안에 가두고, 그 의미를 삭제하거나 애써 축소시켜온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운동 역시 이러한 ‘목록화’의 효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평등’의 전망조차 쪼개진 각각의 권리들을 합치는 것 이상으로 떠올리기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윤석열을 퇴진시켜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이 바로 이 구호, ‘가자! 평등으로!’에 담겨 있습니다. 칸막이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물질적 삶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라벨에 담긴 보편적인 정치적 열망을 연결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공동체적 질서가 ‘평등’을 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앞으로 '윤석열 퇴진‘까지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로 해내고 싶은 일입니다.
※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와 함께하기
- 매주 토요일 열리는 범시민대행진에서 네트워크 공동의 입장과 요구를 담은 신문 <평등으로>를 배포합니다.
온라인으로 다시 보고 싶다면? www.toequality.net/
-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서울에서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집회를 엽니다.
12.25 성탄절 첫 집회 후기가 궁금하시다면? www.gosystemchange.kr/post/ep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