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 물의를 빚고 있다. 7일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이태종 판사)는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아래 이주노조)이 서울지방노동청장을 상대로 낸 노동조합 설립신고서 반려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국내 첫 이주노동자 독자노조로 지난해 4월 24일 창립총회를 개최한 이주노조는 5월 3일 노동부에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서울지방노동청은 △임원의 성명과 주소 △조합원이 소속된 사업장 명칭과 조합원 수 및 대표자 성명 △조합원들의 취업자격 유무확인을 위한 조합원명부(성명·생년월일·국적·외국인등록번호 또는 여권번호) △총회회의록 등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이주노조는 임원의 성명과 주소, 창립총회 회의록은 제출했지만 조합원명부 제출 요구는 거부했다. 결국 서울지방노동청은 6월 3일 이주노조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아래 노동조합법)에서 정한 노동조합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설립신고서를 반려한 바 있다.
이주노조는 재판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라 하더라도 헌법상 노동3권의 주체가 되고 노동법 어디에도 이주노동자의 체류자격 유무를 노조 설립신고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소속 사업장 명칭과 조합원 수 자료 제출요구는 노동조합법 시행규칙에 근거하고 있지만 노동조합법의 위임없이 규정된 것으로 효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조합원명부 요구에 대해서도 노동조합법이나 시행규칙 어디에도 근거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이유로 설립신고서를 반려한 처분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체류자격 없으면 노동자 아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대한민국에 체류자격이 없는 이른바 불법체류 외국인은 출입국관리법상 취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때문에 이들은 장차 적법한 근로관계가 계속될 것임을 전제로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지위향상을 도모할 법률상 지위에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므로 불법체류 근로자들이…노동조합 가입이 허용되는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이주노조 규약에 단속추방 반대 및 이주노동자 합법화 쟁취 등이 설립목적으로 기재되어 있고, 아노아르 위원장이 불법체류 상태이므로 이주노조가 사실상 불법체류 외국인들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고 있다고 의심할 여지가 있다며 서울지방노동청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합원명부 제출을 요구한 것에 위법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한편 재판부는 사업장 명칭과 조합원 수 자료에 대해 2006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복수노조를 금지하는 노동조합법 부칙 제5조 제1항을 근거로 "부칙에서 금지하는 복수노조의 설립여부를 행정청으로 하여금 판단할 수 있도록…(사업장 명칭과 대표자 성명 등을)…제출하도록 정한 것이 무효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불법체류든 합법체류든 노동자는 노동자"
소송을 담당한 권영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부위원장)는 "불법체류든 합법체류든 체류목적이 근로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노동조합법상 근로자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들어 사업장 명칭과 대표자 성명 제출 요구를 정당하다고 인정한 것에 대해서도 권 변호사는 "기업별 노조면 몰라도 이주노조처럼 서울·경기·인천을 포괄하는 초기업 지역별 노조에는 복수노조 금지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13일 성명서를 내 "한국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노조설립 초기 예상되는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우려하여 일단 전체 조합원들의 명단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가뜩이나 신분이 불안한 이주노동자 조합원들의 명단을 모두 소속 사업장까지 명시하여 제출하라고 한 서울지방노동청의 행태는 그야말로 알아서 노조설립신고를 철회하라는 강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개별적 노사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헌법 및 노동관계법령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단결하여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근로조건의 개선 및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단결권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단결권이야말로…노동기본권의 핵심이자 기본전제"라며 서울지방노동청에 반려처분 취소와 설립신고증 교부를 촉구했다.
한편 재판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노동조합법 상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체불임금의 청구나 업무상 재해에 대한 요양급여 지급에 있어서는 근로자로 인정되는 것과 이번 판결이 배치되지는 않는다고 판결문에 덧붙인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정정훈 변호사(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법원이 근로기준법을 적용할 때는 단속법규로서의 출입국금지법 위반을 문제삼지 않으면서 근로자성을 인정해왔다"며 "더 넓은 개념인 노동조합법을 적용할 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법리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사의 자유는 국적과 피부색을 묻지 않는다
한편 이번 판결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도 노동조합 결성권을 인정하는 국제인권기준을 위반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제87호 협약 제2조는 "사전인가를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떠한 차별도 없이 가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협약의 해석에 대해 ILO의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결사의 자유는 직업, 성별, 피부색, 인종, 신앙, 국적, 정치적 견해 등에 기초한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없이, 사적 경제부문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무원과 공공부문의 노동자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못박은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한국 노동자가 갖는 노동조합 결성권을 당연히 가진다.
1990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 제26조는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노동조합 등 단체의 활동에 참가할 권리를 보장하면서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제한 이외의 어떠한 제한도 설정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두 협약의 비준을 미루고 있다. 1975년 채택된 ILO 제151호 권고도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노동조합원 자격 행사를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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