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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죽음을 기억하라

차디찬 물속에서 천천히 식어간 인권

[기획] 죽음을 기억하라 (10) 동사 장애인

[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2005년 12월 19일, 우리는 또다시 한 중증장애인의 죽음을 텔레비전 뉴스로 접했다. 흔히 12월에는 많은 안타까운 사연과 죽음이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전해진다. 중증 근육장애인 조 씨의 죽음 또한 그러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보일러가 터져 새어 나온 물이 방안에 차 들어와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 언뜻 이해가 가기 힘들다는 점이 다를 뿐, 이 땅의 다른 여러 안타까운 죽음들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얼마 후 다시 세상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방안에 스며든 물에 얼어 죽었다는 그 죽음의 원인 때문이었다. 조 씨의 죽음은 이후 장애인계에 큰 이슈를 던졌고, 이제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어느 중증장애인의 억울한 죽음

조 씨는 경상남도 함안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근육장애인이었던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누워서 자신의 몸조차 돌리기 힘들었다. 그런 중증의 장애인이었던 그는 가끔씩 찾아오는 사회복지기관의 가사도우미나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2005년 12월의 겨울도 그런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눈이 많이 내렸고 기온 또한 매우 내려갔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조 씨 집의 보일러가 그 추운 날씨에 터졌던 것이었다. 겨울이면 중증장애인들은 외출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는 방안에 누워서 가끔씩 찾아 주는 그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에 점점 차고 있는 물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그는 다른 날보다 애타게 그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그 차디찬 물에 젖지 않게 해줄 그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그의 의식은 흐릿해졌을 것이다. 추위 속에서 그렇게 죽어갔던 조 씨는 며칠이 지나 조금 일찍 그를 찾지 못했던 사회복지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것이 중증장애인 조 씨의 억울한 죽음의 사연이다.

그럼 왜 조 씨의 죽음이 억울할까? 그의 죽음의 원인은 간단하다. 한겨울에 찬물에 누워있었다가 체온이 급강하한 것이다. 그렇다면 찬물에서 몸을 밀어 낼 수만 있었다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에 전국의 중증장애인들과 특히 중증의 근육장애인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 말도 안 되는 허망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바로 자신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조 씨의 죽음은 개인의 부주의가 불러온 것이 아닌 사회적 방조가 불러온 타살이다. 어찌하여 사회적 타살일까? 그것은 바로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증의 혼자 사는 장애인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했던 이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서방7개국정상회담(G7)의 국가들은 조 씨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인’을 지원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조 씨가 한국이 아닌 그들 국가에 살았다면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2006년 1월 25일 중증장애인 178명이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 2006년 1월 25일 중증장애인 178명이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불붙은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

조 씨의 죽음은 이후 중증장애인들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우리의 주장은 이랬다. “활동보조인을 지원하지 않고 있는 정부에게 조 씨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향후 활동보조인을 제도화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국가인권위는 보건복지부에 활동보조인의 지원을 권고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타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권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중증장애인들은 정부의 활동보조인 지원을 강제하고 그것을 제도화하기 위하여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 첫 시작은 서울이었다. 물론 보건복지부에도 먼저 선전포고를 해 놓은 상태였다. 2006년 3월 말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40여 일 동안 노숙투쟁과 삭발, 기습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중증장애인이 맨몸으로 기어가는 투쟁으로 마침내 ‘현 대통령 당선자’인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서울시와 이명박 시장은 공문에서 “활동보조인은 중증장애인의 권리”라고 밝힌다. 투쟁은 서울시를 시작으로 대구, 인천, 충북, 경기, 부산 등 전국적인 투쟁으로 번졌다. 급기야 보건복지부도 30여 일의 노숙투쟁 끝에 ‘활동보조인의 제도화’를 약속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조 씨와 같은 허망하고 억울한 죽음을 접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도 이 땅의 장애인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최소한 경제규모 10위권의 나라에서 조 씨와 같은 억울한 죽음은 접하고 싶지 않다. 2007년 4월부터 시작된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1년 6개월만 빨리 시행이 되었어도 조 씨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는 우리의 곁에 없지만 그의 죽음은 이 땅에 활동보조인 제도를 만들게 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맨몸으로 건넌 장애인들 [출처] 장애인문화공간

▲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맨몸으로 건넌 장애인들 [출처] 장애인문화공간



활동보조서비스는 도입되었지만…

2007년 4월부터 활동보조인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에게 갈 길은 멀다. 한 달에 90시간 밖에 되지 않는 부족한 시간과 자부담, 그리고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활동보조인의 수급문제 등 개선하고 투쟁해야 할 것들이 많다. 먼저 활동보조서비스의 시간을 보면 2007년에 보건복지부의 최대지원시간은 80시간이었다. 물론 특례시간 180시간이 일부 존재하기도 했지만 이는 보편적 지원기준이 아니어서 실제 180시간을 받는 사람은 5%도 되지 않았다. 이마저도 올해부터는 하지 않겠다고 한다.

새해부터는 최대지원시간이 10시간 늘어 90시간이 된다. 비장애인이 대다수인 국민들은 활동보조지원시간의 적정선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나 이미 활동보조인을 지원하는 다른 국가들은 한국의 보건복지부가 예외로 작년 한해 주었던 180시간이 바로 기본시간이고 최대치의 상한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본인부담금의 문제도 현재 한국은 일률적으로 10~20%를 정하고 있지만 외국은 일률적이 아닌 기본 180시간을 초과하는 부분을 개인의 소득에 따라 부담한다.

마지막으로 활동보조인의 노동조건 문제가 남는다. 사실 본인부담금 문제와 활동보조인의 열악한 노동조건의 원인은 정부의 시장화 정책에 있다. 정부는 바우처 제도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책임과 의무를 민간에 떠넘기고 있다. 활동보조인의 노동조건을 민간 더 나아가 비정규직 노동시장에 맡기려 하는 정부의 의도 때문에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중증장애인의 기본적 생활시간 보장과 정부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책임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이전보다 더욱 ‘가열찬’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2008년 새해에는 과연 지난해보다 장애인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더 이상 집이나 생활시설에서 죽는 또는 살해당하는 장애인은 없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경제개발에 ‘미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런 물음들이 무시되지나 않을지. 희망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또 한 번 희망을 일구어야겠다. 부디 하늘나라의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우리를 응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임

◎ 박홍구 님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