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문을 돌려주며 내용을 전하자 ㄱ은 멋쩍게 웃었다. 아이가 영어 숙제를 하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남편한테 미루곤 하는데, 남편이 바빠 못 봐줄 때도 있고 매번 남편에게 기댈 수도 없어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더욱이 남편은 ㄱ이 영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의 질문은 잦아질 테고 큰애와 한 살 터울인 둘째아이까지 생각하면 더 답답하지 않을까 싶었다.
차종 물을 때 겁나
ㄱ은 초등학교만 나왔다. 졸업식도 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서 일해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혼자서라도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굳이 ‘오륀쥐’ 파문을 들먹이지 않아도 어디서고 영어가 범람한다. 그 속에서 겪는 불편함은 어떤 것일까.
“영어로 나오는 것 자체가 다 불편하지. 텔레비전에서도 영어 많이 나오잖아. 특히 광고. 영어 밑에 번역을 안 해 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누가 나한테 저거 뭐냐 물어보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기는 하지만 답답하긴 하지. 영어를 우리말로 써 주는 경우도 있긴 한데 뭔 말인지 못 알아먹긴 마찬가지야. 생활하면서 젤 당황스러울 땐 차종 물을 때. 같이 가던 사람들이 지나가는 차 보면서 저거 어떠냐 물으면 일단 덮어 놓고 심장이 벌렁거려. ***(차종)는 뭐가 어쩌느니 저쩌느니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때 말을 못하면 영어 모르는 게 티 나니까. 평소에 외워둔 차종이면 다행인데 신형일 경우엔 갑자기 말을 돌려 버려. (웃음)”
그들만이 사는 법
ㄱ은 차 모양과, 차의 이름 첫 자와 한글 이름을 외워 차종을 구별한다. 연애시절엔 커플링 때문에 남친과 다투기도 했다. ㄱ이 제 이름과 무관한 JT를 써 주었기 때문이다. 남친은 그 의밀 캐물었고, ㄱ은 끝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딘가에서 보고 외워둔 것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터넷 사용은 더 두렵다. 주소창에 사이트를 쳐 넣는 어려움은 젖혀 두더라도 이메일 계정 하나 트는 일도 녹록지 않다. 뭐든 영어를 섞어 만들어야 해서이다. 끙끙대며 한글 자판에서 이리저리 말을 조합해 겨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완성할 수 있었다. 혹시 잊을까 봐 아이디 저장 부분은 체크해 두기도 했다. 공인인증서는 남편이 만들어줬고, 사용법도 남편한테 배웠다. 하지만 암호를 쳐 넣다 애먹은 뒤론 직접 은행에 가서 일을 처리하는 편이다. 대소문자를 구분해서 입력해야 하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던 것이다. ㄱ은 지금도 대소문자 구별이 어렵다.
영어를 몰라 겪는 가장 큰 불편함은 아이들 일이 걸렸을 때다.
“저번에 큰애 참관 수업에 갔는데 선생님이 애들한테 계속 영어로 말하더라고. 앉고 일어설 때도 그렇고. 칠판을 주목하라고 할 때도 그렇고. 영어수업도 아녔는데…. 간단한 그런 말까지 모두 영어로 하니까 그날 더 위축이 됐어.”
덧붙임
녹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돋움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