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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나와 당신의 거리

[나와 당신의 거리] 거리는, 사고를 요구한다, 그리고 감각마저

넷째날 민주_주의_거리

<편집인 주>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 동안 15회 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인권오름>은 15회 인권영화제가 내건 ‘나와 당신의 거리’라는 슬로건으로 각 상영일의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 나와 당신이 함께 서 있는 거리, 그리고 더욱 다양한 거리들. [나와 당신의 거리]를 읽고 마음이 술렁이는 당신, 마로니에 공원에서 펼쳐질 ‘나와 당신의 거리’로 나오시라.


1.
어른이 되고부터, 줄곧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에서 세상을 배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동갑내기 젊은이가 학교 앞 백주대로에서 백골단의 몽둥이에 맞아 삶을 빼앗겼고, 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밤을 샐 수밖에 없는, 한심하고 야만스런 계절이, 내 어른시절의 첫 봄이었다.

1997년 종로

▲ 1997년 종로

연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앞 어두운 새벽거리, 골목골목 노란 가로등 아래 번뜩이던 백골단의 헬멧을 노려보며 가슴 졸이던 기억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죽은 이의 몸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입으로는 ‘투쟁!’을 외쳤지만, 속으로는 그 ‘거리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무섭다, 고 말은 못해도, 아니 무섭다, 고 말을 꺼낼 수 없기에, 두려웠다.

누군가의 죽음에 항의하기도 전에, 아니 항의하기 위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은 이의 몸을 지켜야만 했다.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빼앗기지 않는 게 중요했다. 비록 강경대의 죽은 몸은 지켰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벌어지지 말아야 할 ‘어떤 일’들은 참 빈번하게도 벌어졌다.

노동운동가 박창수의 죽은 몸을 탈취하기 위해 장례식장 벽을 뚫고 난입한 백골단의 풍경을 한겨레신문 1면에서 마주했을 때, 그의 몸을 돌려달라고 거리로 나서는 수밖에,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광장이 닫힐 때, 열려있더라도 무기력할 때, 거리는 ‘움직이는 광장’이거나 ‘장소 없는 광장’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나갔다.

강의실을 박차고 거리에 서는 것이, 거리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해 오월,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거부하기 위해 죽음으로 저항했던가, 그들을 잃은 분노와 슬픔은 어떻게 체포와 투옥과 수배의 길로 이어졌던가. 많은 이들에게 거리는 가슴 벅찬 해방구인 동시에, 무기력을 절감하는 좌절의 공간이기도 했다.
2009년 세종로

▲ 2009년 세종로


2009년 용산

▲ 2009년 용산


2.
이듬해, 어둑해지는 가을의 교정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대자보에 한 여성의 주검이, 윤, 금, 이, 라는 촌스럽지만 예쁜 이름을 가진 이의 주검이, 캐네스 마클이란 낯선 이름의 미군에 의해 난도질당한 채, ‘속보’라고 쓴 빨간 글씨 옆에서 내 눈의 의심을 견디고 있었다. 그 장면을 의심 없이 바라본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것을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얼빠진 놈이었다. 한 동안은 눈을 감아도 망막에 여전히, 딴 생각을 하려해도 머릿속에 여전히, 그 이미지가 어른거렸다.

1998년 종로

▲ 1998년 종로


그녀의 뼛가루를 탑골공원에 뿌리던 날의 거리풍경을 떠올린다. 공원 작은 나무 아래 곱게 빻은 뼛가루를 흩뿌리던 순간, 백골단이 내던진 최루탄도 작렬했다. 사위는 별안간 매운 안개로 뒤덮였다.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 누군가를 잡아가는 소리가 난무하는 매운 안개의 거리, 분노라기보다는 자괴감이 엄습하는 그 거리에서, 나는 멍하게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92년 장마’가 이미 지나간, ‘웬디스 햄버거 간판이 읽히는’ 종로 거리, 최루탄이 난무하는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팻말을 들고 있는 남학생의 사진이 이튿날 어느 신문에 실렸을 때, 나는 이런 모든 풍경들이 지긋지긋하고 싫어졌다. (그것은 사진 찍힌 자의 불편함을 알게 해준 귀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3.
그러고도 쏘다녔다. 줄기차게 거리를 배회했다. 궁금함이 쌓여갔다.

내가 거리에서 목격한 풍경과, 미디어가 ‘오늘의 사실’이라고 중계해 준 풍경사이엔 왜 간격이 있을까. 그 간격이 왜 이다지도 넓고 깊을까. 가장 사실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거짓이라곤 모를 것 같은 ‘사진’이 중계해 준 사회적 풍경은 왜 자꾸만 나를 혼란에 빠뜨릴까. 사진은 목격이 될 수 있을까, 목격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을까, 가치중립은 온당한 일인가, 대체 무엇이 온당한 목격이며 기록인가.

그렇다면 거리는, 거리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의 실체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시공간일까. 오히려 거리는, 거리의 한계를 난삽하게 드러낼 뿐, 요체는 다른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거리의 요구가, 거리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까. 거리의 요구는 무엇과 결합해야 하는 걸까.
2006년 대추리

▲ 2006년 대추리


해소되지 않는 고민들을 부여잡고 훌쩍대다가, 조금은 늦게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므로 예전의 거리와는 약간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한 때 거리의 참여자였으나, 이제 거리의 관찰자/중계자/기록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사태의 거리를 바지런히 쏘다녔는데, 아뿔싸 유탄이 내게 날아왔다. 직장을 잃었다. 허나 시작한 일을 그렇게 접을 순 없었고, 쓸데없는 고집에 집착하는 성격이라 프리랜서(말로만 멋진) 사진가로 두어 해를 거리에서 버티다가, 간신히 기자생활로 돌아갔다. 그래도 거리는 늘 일터였다. 묵은 필름들을 들춰보면, 지난 10여년 거리에서 얼마나 잡스럽고 험난하며 사무치도록 고단한 일들이 벌어졌던지, 새삼 한숨이 나온다. 기자란 모름지기 의심이 많아야 하는데, 의심이 너무 많으면 기자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된다.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공부를 했다.
2000년 명동

▲ 2000년 명동


4.
학교에선 ‘순수한’ 사진을 가르치려했으나, 나는 별로 순수하지 않아서 어려운 점이 없었다. ‘거리풍경’은, 특히 거리가 드러내는 ‘사회적 풍경’은 선생님의 관심 밖이었고, 그러므로 나는 아무런 간섭 없이 공부와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결국 대학원 공부를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2002년 종로

▲ 2002년 종로


2000년 세종로

▲ 2000년 세종로

5.
그러던 2002년, 미선 효순 압사사건이 벌어졌다.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자꾸 떠오르는 건 10년 전의 그 일이었다. 1992년 윤금이 씨 사건 때, 우리사회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 기울였더라면, 그리하여 소파처럼 안락한 SOFA(소파, 한․미 상호방위 및 주한미군 지위 협정)를 조금만 더 불편하게 개정했더라면, 아니 2000년 광화문 거리에서 외롭고 참담하게 진행됐던 SOFA 개정투쟁에 조금만 더 힘을 보탰더라면, 두 아이를 이렇게 허망하게 잃지는 않았을 텐데. 그것이 비록 사고였다하더라도, 이렇듯 무책임과 무능력의 파노라마를 연출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아울러.

10년 전 윤금이 씨의 죽음을 항의하는 거리에서 사진 찍혔던 내가, 이제는 여중생의 죽음에 항의하는 거리의 학생들을 사진 찍고 있다는 심란함, 내 사진 속 누군가는 다시 10년 뒤 비슷한 심란함을 안고 거리에 설지 모른다는 부질없는 예견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책 없는 심란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가.

2009년 용산

▲ 2009년 용산

그런 어지러움은, 살아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가 새까만 재로 내려와야 했던 철거민의 거리, 용산 남일당 앞에서 임계점에 달했다. 왜 하필, 그날 그곳에 갔을까. 쌍팔년도 영화 <상계동 올림픽>이, 공구년도 <남일당 디자인 올림픽>이 되어 내 앞에 펼쳐질 줄은 미처 몰랐다. 대체 거리는,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일까.

6.
국가인권위가 없어 고달팠던 계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국가인권위가 있기에(있어도) 슬픈 계절이 왔다. 2000년 겨울 명동의 거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가인권위 설치”를 외치며 단식투쟁하던 인권운동가들의 모습이 지나간 역사의 풍경사진이 될 줄만 알았는데, 자본주의연구회(공산주의연구회도 아닌)에 공안경찰이 들이닥치고,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이권위원회로 전락해 버렸으니, 그 겨울 그 거리의 고단함은 얼마나 허망한가.

대체 거리는,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거리를, 산책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것일까.
2001년 여의도

▲ 2001년 여의도


7.
자고로 기록자는 너무 가까이 가도, 너무 멀어져도 안 되는 ‘불가근불가원’의 원칙을 지켜야 하거늘, 나는 여러 번 실패했다. 어설픈 ‘거리 두기’가 싫어 빠짝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 아예 멀어진 적도 있었다. 거리감은, 좁히되 잃어버려선 곤란한 감각이다. 특히 거리에선 더욱.

2005년 여의도

▲ 2005년 여의도


8.
어떻게 하면 우리는, 거리감을 잃어버리지는 않되, 이 위태로운 공멸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여전히 거리에 서고, 그것이 왜 아직도 중요한 것일까.

거리는, 사고를 요구한다. 감각마저 요구한다.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15회 인권영화제 넷째 날(5.22 일) 민주_주의_거리

12:00 용산 Yongsan
문정현 | 2010 | 다큐 | 73분 | HD | 컬러 | 16:9 K KS TA
2009년 1월, 강제철거로 길거리에 내몰린 철거민들이 화염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용산의 불길을 보는 순간, 역사의 굵직한 순간마다 나(감독)를 스쳐갔던 죽음들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보았던 대학생의 분신에서부터, 6월 항쟁의 이한열 열사, 광주민주항쟁의 기억까지. 이 다큐멘터리는 죽음으로 그려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13:50 미국의 바람과 불 An Escalator in World Order
김경만 | 2011 | 다큐 | 118분 | DVCam | 컬러+흑백 K KS TA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믿음은 마치 기독교와도 같았다.

16:30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 The Day that Bastard became President
손경화 | 2011 | 다큐 | 66분 30초 | HD | 컬러 | 16:9 K KS TA
‘나’에게는 가난한데도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아빠가 있다. 진보정당 지지자인 ‘나’는 그런 아빠의 태도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의 생각 아니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향인 대구로 향한다.

18:30 <폐막작> 파이프 The Pipe
리드테아드 오 돔네일 | 2010 | 다큐 | 83분 | HD | 컬러 E KS
96년 아일랜드 서쪽 해변에 가스가 발견된다. 가스를 운반하기 위한 파이프라인은 아일랜드 로스포트라는 지역의 어촌을 통과하게 된다. 송유관 건설로 인해 생태계의 파괴와 생계 수단을 상실할 것을 예상한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경찰을 앞세워 석유개발기업인 로얄 더치 쉘의 편을 든다. 영화는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어 K한국어 E영어 S스페인어 Q퀘추아어 B버마어 T티베트어 L라다크어
자막 KS한글자막 ES영어자막
장애인 접급권 화 화면해설 더빙 한국어녹음
TA 관객과의 대화
덧붙임

노순택 님은 사진가입니다. 위에 실린 사진은 모두 노순택 님의 소중한 노동으로 기록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