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형법 일반교통방해 조항에 대한
헌재의 합헌 결정을 규탄한다
오늘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를 집회․시위에 적용하는 것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는 그동안 검찰과 경찰이 집회․시위에 과도한 형벌을 가함으로써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해 온 관행을 중단시키기는커녕 면죄부를 준 것이다. 또한 집회․시위를 범죄로 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시민들의 기본권을 짓밟는 데 일조한 것이다.
형법은 “육로, 수로 또는 교량을 손괴 또는 불통하게 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기타 방법’이라는 문구가 의도적이고 직접적으로 교통을 방해한 경우를 의미하므로 불명확하지 않고, 집회․시위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개별 사건에서 법원의 법률 해석과 적용에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의 판단은 도로에서 벌어지는 집회․시위의 본질적인 속성을 망각한 것이다. 일반교통방해죄의 목적은 도로를 파괴하거나 교통 표지판을 부수는 행위 등을 금지함으로써 교통 소통이라는 공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도대체 다수의 사람들이 도로를 파괴하지도 않고 장애물을 설치하지도 않는 집회․시위를, 단지 행진을 통해 교통 흐름을 막았다는 이유로 일반교통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발상을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독일과 일본처럼 외국의 비슷한 입법례도 집회․시위를 일반교통방해죄로 처벌하지는 않는다.
헌재의 합헌결정은 집회․시위가 교통 소통에 장애를 초래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는 식의 논리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는 헌법적 기본권인 집회․시위보다 교통 소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법적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으로,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 보호 의무를 포기해 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헌재의 논리에 따르면 도로에서의 집회․시위는 집시법상의 정당화 요건을 갖추지 못하는 한 언제나 일반교통방해죄로 처벌되어야 할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가 집회․시위에 대한 집시법 상의 지나치게 엄격한 제한과 결합하면 집회․시위의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제한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권력자가 대중매체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 소수자․약자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의사 표현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주권자가 국가와 지배계층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권리이자, 기존 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기본권을 보장하는 체제를 스스로 만드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다. 현행 헌법의 모태가 된 6월항쟁, 헌법이 전문에서 스스로 언급하는 3.1운동과 4.19가 그러하듯, 집회․시위의 자유는 민주적 헌법 질서를 창출하는 적극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집회․시위의 권리는 사회권 등 여타 권리의 박탈에 항의하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른 권리의 보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주요 권리이다. 헌법이 다른 기본권에 비해 더욱 엄격하게 보장하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교통 소통의 이익보다 하위에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량의 통행을 헌법적 권리와 경합시키는 접근 방식은 집회․시위에 참여한 사람과 차량 운전자 사이를 갈등하게 만들어 결국 집회․시위의 자유를 손쉽게 제한하려는 공안당국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헌재의 눈에는 기본적 인권의 주체로서의 시민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집회․시위의 자유는 다른 범죄를 수반하지 않는 한 그 자체가 범죄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기본권이다. 인간이 모여 걸을 때 그것이 설령 차도이더라도 그 행진을 형법상의 범죄로 단죄하려는 것은 교통 소통만을 지상가치로 여기는 사고이다. 필요하다면 차량을 우회시켜 교통 소통이 원활하도록 하는 책임은 경찰에게 있다. 교통에 지장을 줄 만큼 많은 사람이 집회․시위를 한다면, 진정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일은 군중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많은 사람이 모일 정도로 강력한 주의와 주장을 어떻게 정치적 의사로 수렴하고 의제로 설정하느냐는 문제이다. 인간이 평화적으로 공공의 도로를 걷는다고 곧 반사회적, 반윤리적 ‘범죄’로 단죄하는 법해석으로부터 이제 벗어나야 한다.
한편, 헌재는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에 비해 과도한 형벌을 규정한 것도 법관의 양형을 통해 개별 행위마다 조절될 수 있으므로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는 공안당국이 집회․시위에 굳이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고 있는 의도를 간과한 것이다. 형사소송법이 5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현행범 체포를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경찰은 일반교통방해죄를 활용하여 현행범 체포를 감행하고 있다. 이처럼 일반교통방해죄로 집회․시위를 탄압하는 일을 헌법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형사소송법의 인권보장 장치는 간단하게 무력화될 것이다.
헌재가 합헌 결정을 했다고 해서 그동안 중단되었던 개별 재판에서 피고인들이 곧바로 유죄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법원은 명심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건에서 집회․시위의 장소나 교통 저해의 불가피성 등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법원으로 공을 넘겼을 뿐이다. 집회․시위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의 이념에 비추어 일반교통방해죄의 적용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법원 본연의 책무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법원은 개별 사건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일반교통방해죄의 적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판결해야 할 것이다.
2010년 3월 25일
인권운동사랑방
(사)천주교인권위원회
성명/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