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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마음의 부적

좀 뜬금없지만 이번 활동가의 편지에는 사랑방 사무실의 가장 구석진 자리, 제 책상 옆 벽면에 붙어 있는 제 ‘마음의 부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엽서를 덕지덕지 붙여 꾸며놓은 시멘트벽일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씩 의식적으로 의자를 뒤로 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 그림과 문구들을 가만히 바라보거든요.

 

 

포기방지용 부적

벽면 맨 오른쪽엔 제가 사랑방 활동을 시작했던 2019년부터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엽서가 붙어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매년 초 활동가들이 자리를 옮길 때에도 버려지지 않고 저와 함께 계속 이동을 했죠. 극장 안에서 아녜스 바르다 영화를 보고 있을 때면 저는 대부분 비참하거나 암담하거나 쓸쓸한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용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엽서 속 시선이 어떤 순간 저를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 옆엔 친구가 만들어준 1년 달력 엽서 중에서 아녜스 바르다와 뗄 수 없는 ‘해변’ 사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지나기 힘든 다리를 만나면 손잡고 같이 건널테니… 뜻대로 잘 안될때는 업어서 건너주리니… 또 한걸음 내딛어보자.” 올해 3월에는 보라 목사님이 남긴 문구가 적힌 새로운 엽서를 붙였습니다. 한창 사랑방 30주년을 준비하던 2월에는 향할 곳 없는 분노와 원망 속에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또 아득하기만 하네요. 이후에 사랑방 상임활동비가 조금 오른 틈을 타 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을 다시 시작했는데, “평등하게 나답게” 문구가 새겨진 엽서를 받고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열심히 하라는 계시인가?’ 웃으면서 임보라 목사님 엽서 바로 곁에 붙였습니다. 또 한걸음을 어디로 어떻게 내딛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더라도요.

가장 왼쪽엔 제가 가장 오랜 시간 사랑한 SF 드라마/영화인 <스타트렉> 팬아트 엽서 속에는 두 주인공의 대사가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우주 전체와 맞먹을만한 가치가 있을까?”(Can any one man be worth an entire universe?) - “YES.” 이 대사를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건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스스로의 확신보다, ‘당신은 내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예외적인 존재 때문이라고요. 

사실 벽에 붙은 모든 표정, 이야기, 구호가 딱 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아요. 나도 그랬으면 싶고 언젠가 내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필사적인 마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가 맺힐 때, 마음이 무너질 때 

“어릴 때부터 우리는 똑같은 일을 겪는다. 경찰이 우리를 멈춰 세우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안에서 뭔가가 맺힌다.” 

요즘은 프랑스 낭테르 소요 사태를 다룬 기사들을 챙겨 읽습니다. 알제리계 이민자 출신의 17세 청년 ‘니엘’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이후, 위 인터뷰처럼 비슷한 삶의 조건에 놓인 프랑스 청년들의 이야기가 짧게나마 실리기도 합니다. 프랑스 이민자 사회의 역사, 구조화된 인종주의 규범과 시민통합 모델의 오랜 위기, 방리유에서 반복되는 소요 사태를 쭉 따라가다가 결국은 ‘안에서 뭔가가 맺힌다’는 문장의 끝에 눈길이 머무릅니다.

저는 기사나 글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개인적으로 모아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마음이 덜그덕거리는 이야기들입니다. 가끔은 어떤 글을 읽다가 ‘분명히 비슷하게 느낀 순간이 있었는데…’ 하고 떠오르면, 구글 킵을 켜고 느낌적인 느낌에 의존해서 이전에 저장해둔 메모들을 검색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빈곤층 청년을 지원하는 한 기관 대표의 인터뷰를 담은 메모가 뜨네요. “18살 청년 부모가 주민센터에 ‘긴급생계비’ 신청을 했는데, 공무원이 고압적으로 다그치면 숨을 곳이 없다고 했다. 차별받으면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고.”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종종 어떤 글을 읽는 것만으로, 구체적인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뭔가가 맺히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제 일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심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도 그런 심정이 들 때가 있을까요? 물론 일상의 매 순간을 그런 심정으로 살지는 않고 실제로 찰나의 감정이기도 합니다. 작고 희미한 무력감이 쌓이지 않도록, 찰나의 감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우 노력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나는 언제, 무엇 때문에 (혹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심정이 드는가’ 답이 없는 질문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남겨둡니다. 

‘어떤 무력감이 싫고, 그런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기로 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 혼자서 급발진하고 비약하게 될 때, 그냥 제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를 단순하게 그려봅니다. 마음에 뭔가가 맺히고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 저 자신이나 어떤 누군가가 계속 서 있어야만 하는 세상은 아니거든요. 누구에게든 그런 세상이 아니어야 나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굉장히 선명하고 또렷한 개인적인 욕구가 있고, 그게 결국엔 운동을 하는 이유구나 싶습니다. 

가끔씩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온라인 밈(meme)을 볼 때마다 허탈하게 웃으며 마음의 부적들을 쳐다봅니다. 아마 저 같은 심정으로, ‘다 울었으니 이제 할 일을 하자’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는 않을 거라는 추측을 해요. 특히 활동가들이 그렇지 않을지, 그때 다들 어떤 마음의 부적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모두 그런 필사적인 마음을 지켜줄 부적 하나쯤 가지고 있기를, 그 어느 때보다 바라게 되는 2023년 여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