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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석탄발전의 멈춤이 우리 삶과 연결되기 위한 질문

 

‘기후위기’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한국사회도 ‘탈석탄’으로 더딘 걸음을 하나둘 내딛고 있다. 이미 2021-2022년에 6기가 폐쇄되었고, 당장 내년 2025년부터 태안화력 1·2호기를 시작으로 다시금 폐쇄가 진행된다. 그러나 위기에 대응하는 긍정적인 수순을 마냥 반갑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고용불안’과 ‘지역소멸’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마주하게 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0일 토요일, 충남 태안 한복판에서 1천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석탄 발전은 멈춰도 우리 삶은 멈출 수 없다”고 외치게 된 이유다.

 

‘거리감’이야말로 우리가 ‘연결’되어야 할 이유였다

충남 태안의 석탄화력발전소가 일터인 발전노동자들이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행진》(이하 ‘충남행진’)을 준비한다는 건 작년 말부터 알았지만, 스스로를 참여자로만 생각했던 내가 어쩌다 서울 지역에서 충남행진 참가자를 조직하게 되며 예상치 못한 어려움까지 맞닥뜨리게 됐다. 개인적으로 충남행진은 여타 행사보다 서울에 사는 다양한 이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기 유난히 어려웠고, 그 중심엔 ‘거리감’이 있었다. 먼저 ‘집회 장소’. 서울에 사는 이들이 ‘서울 아닌 곳’에서 여는 집회에 느끼는 문턱은 꽤나 높았다. 그러나 작년 <414기후정의파업>이 대정부 투쟁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정부청사가 있는 세종에서 열렸던 것처럼, 충남행진 역시 석탄발전소가 재가동되는 첫 지역인 충남 태안에서 여는 장소적 의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거리감은 단지 물리적인 문제가 아녔다. 이 거리감의 핵심은 발전소에서 일하는 이들과 아닌 이들, 발전소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 간 ‘괴리감’을 만든 구조적 문제에 있었다.

고용불안. ‘해고는 살인’이란 오랜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 특히나 가진 게 없는 이들일수록 고용과 생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각자도생의 주문은 살려면 죽어라 일해야 하는 사회, 그러다 정말 죽기도 하는 사회가 문제라 생각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새 해고는 회사 사정, 나아가 국가경제-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며 극복해야 할 일이 되어왔다. 그러니 발전노동자가 석탄발전소 폐쇄로 인한 곤경을 토로하는 기사에 달린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어쩔 수 없이 직업도 바꿔야 살아갈 수 있는 법”이란 댓글에 끄덕이는 이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지역소멸. 정부는 말로만 ‘지역격차 해소’ 염불을 외울 뿐, 서울/수도권에 주거·의료·교통·교육과 같은 인프라를 집중시키며 격차를 유지시키며 사실상 그 누구보다 격차를 공고히 해왔다. ‘서울 공화국’이라는 말은 단지 서울/수도권과 비서울/비수도권 간 격차에 그치지 않고, 지역 간 불평등, 가려진 착취관계를 의미한다. 어떤 지역에겐 타지역 혹은 대기업 자본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땅과 노동을 착취당하는 게 유일한 ‘사용가치’이자 ‘생존법'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 특히나 서울은 자신의 일상적 풍요가 누구의 땀과 눈물로 세워졌는지 잘 모르는/몰라도 되는 장소가 되어왔다.

발전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위기는 산업전환 과정에서 누군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불운’이 아녔다. 충분히 대책을 세울 수 있음에도 희생만을 종용하는 정부의 ‘무책임’, 즉 ‘폭력’이 바로 위기의 본질이다. 그리고 전환의 정당성/시급성만을 앞세우며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비민주적이고 부정의한 과정은 이 위기가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발전노동자, 지역주민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삶을 재생시키는 에너지 체제, ‘정의로운 전환’으로 권리를 되찾자

이번 기회로 나부터가 충남행진에 ‘당연히’ 함께한다는 관성을 넘어 ‘왜’ 함께하고 싶고, 함께해야 하는지를 나의 자리, 나의 경험에서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나/우리가 이미 발전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연결되어있단 당연한 사실이다. 비록 발전소도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도 물리적으로는 멀게 느껴질지라도,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은 발전노동자들의 노동에 기대어왔지 않나. 동시에, 2018년에 멈춘 발전비정규노동자 김용균의 삶이 떠올랐다. 우리의 일상과 사회를 굴리는 전기를 만드는 노동자가 캄캄한 새벽에 혼자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죽어도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차별’과 ‘불평등’의 세계. 그 세계는 산업전환 과정에서 발전노동자를 ‘소외’하고 ‘배제’하는 일이 어쩔 수 없다는 지금의 세계로 이어졌다.

나날이 더 밝게 빛을 내고, 잠들지 않고 움직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의 전기가 계속해서 충당되는 도시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전기/에너지의 권리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난방비조차 버거워 부탄가스로 몸을 녹이고, 비닐하우스에서 혹한을 견뎌야 하고, 지하철과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는 이들부터 그저 에너지를 이용하고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소비자'로의 자리에 갇힌 채로 에너지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또 얼마나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질문하지 못했던 이들까지. 결국 “석탄 발전은 멈춰도 우리 삶은 멈출 수 없다”는 말 속 ‘우리’는 이미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석탄발전의 멈춤은 저절로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에너지‘원’ 뿐만 아니라 ‘체제’를 상상하고, 또 질문해야 한다. 누군가에 대한 배제-착취에 가담하지 않을 권리, 우리 모두가 착취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착취할 틈을 주지 않는 우리의 ‘정의로운 전환’으로 전기/에너지를 모두의 권리로 만들자. 서로의 권리를 되찾는 동료가 되어주며 우리 모두가 전환의 주체로 등장할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