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홈페이지 상담게시판에는 하루에도 몇 건씩 상담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온다. 전화, 이메일로 오는 상담까지 합친다면 하루에 평균 3건 이상의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상담을 요청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내가 혹시 동성애자면 어떡하나”를 고민하는 성정체성 관련 내용과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 혐오와 억압으로 인해 힘든 상황에 놓인 레즈비언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내용이다. 어디에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이기에 용기를 내어 상담소까지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다. 그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별이나 억압을 받는 이유의 대부분은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상처를 입게 해서 또는 어떤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단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있느냐?”
레즈비언은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가 견고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혼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여성성’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할 때부터 일을 하는 내내 그곳 사람들로부터 가시적인 혹은 비가시적인 멸시와 눈총을 받는다. 상사나 동료로부터 “나이가 찼는데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 “남자친구는 있느냐?”, “왜 아직도 룸메이트와 같이 사느냐?” 등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일상적으로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사가 주선하는 소개팅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서 원치 않는 상대와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 이를 피하기 위해 지갑에 친한 남자친구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애인이라고 얘기를 한다든지 컴퓨터 바탕화면에 남자 연예인 사진을 깔아놓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러다가 직장 동료 누군가에게 아웃팅을 당하거나 커밍아웃 후에 다니는 회사에 소문이 퍼지게 되면 노골적인 혐오의 눈초리와 따돌림을 당하고, 심지어 정당한 이유 없이 전근이나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레즈비언인 피해자는 부당한 해고에 대해 신고를 하고 싶다 해도 국가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레즈비언은 폭력이나 사기로 인해 경찰서에 갈 필요가 있을 때에도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두려워 참고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용기를 내어 경찰서에 가게 된다고 해도 역시 조사과정에서 경찰들로부터 “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사귈 수 있느냐”, “둘은 언제부터 레즈비언이었냐” 등의 불쾌한 말을 듣거나 불필요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행동하는 경찰들도 있다.
특히 레즈비언들은 남성들의 성폭력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상담소에는 다니는 학교 선배 또는 직장 상사에게 레즈비언임이 들킨 이후부터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내용의 신고도 적지 않게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 가해자들은 아웃팅을 매개로 협박을 하며 금품을 요구하거나 성관계를 강요하는데 이는 레즈비언을 타켓으로한 아웃팅 매개 범죄이다.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범죄들은 날이 갈수록 치밀해지고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경우에도 레즈비언들은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차라리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호모포비아(동성애, 동성애자에 대한 이유 없는 공포증, 혐오증)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레즈비언은 차별받아도 된다는 차별(금지)법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부에 법률 제정 권고를 하고, 올해 10월 법무부에서 입법예고를 한 ‘차별금지법’은 이런 부당한 차별행위에 대해 피해자가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제도를 마련하는 기초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차별금지법안에서는 성별·장애·나이·출신지·인종·학력·성적 지향(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무부가 법제처로 넘긴 차별금지법안은 본래의 목적이 크게 훼손된 반쪽짜리 법안이 되고 말았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낸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자차별금지법안저지의회선교연합’을 발족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무부를 압박하여 차별 범주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동성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우리나라를 동성애자 천국으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주장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심지어 이들은 11월 1일과 8일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동성애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다. 차별금지법안은 단지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명시한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인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호들갑에 덩달아 편승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며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한 법무부의 태도는, 동성애자는 당연히 차별받고 억압받아도 된다는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호모포비아를 수면 위로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당연하다고 세상에 공표했고 소수자에 대한 핍박을 정면으로 드러내었다.
조직적으로 동성애자를 탄압하는 보수 기독단체들과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마음대로 법안을 훼손한 법무부를 보며 드는 생각은 “저들은 왜 이유 없이 동성애자를 핍박하는가”이다. 그들은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귀와 눈을 닫은 채 오로지 성서에 있는 구절을 내세우며 동성애자 차별이 마땅하다고 소리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안이 통과되면 자신의 자식들이 동성애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고, 이 법안이 통과되면 다음엔 동성애자들의 결혼도 허용될 것이고 남자 며느리를 맞아야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동성애는 취향도 기호도 아니다
동성애는 동성의 상대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심리적, 사회적, 성적인 이끌림을 말하며 동성애자는 이러한 이끌림을 느끼는 사람 중에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정체화한 사람을 뜻한다. 동성의 상대에게 느끼는 이러한 이끌림은 이성애자가 이성에게 느끼는 이끌림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다. 동성애자는 단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동성과 성관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취향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지 삶의 전반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동성애자 본인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와 동떨어져 외딴 섬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이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최소한이기는 하지만 만일 차별금지법안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통과 되었다면 많은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사회의 부당한 차별행위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많은 10대 이반들이 정체화 과정에서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될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적 지향’ 삭제사태를 보며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활동가이면서 한 사람의 레즈비언으로서 나는, 이제 더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웅크리고 받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마 이런 사태는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으로 어이없는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함께 대항하며 그들의 핍박에 정면으로 맞설 것이다. 이제는 아무 이유 없는 괴롭힘과 차별을 묵묵히 받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덧붙임
◎ 박은우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