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아그대다그대

내 인생의 이사

12월에는 ‘내 인생의 이사’를 아그대다그대 이야기합니다.


우리집이 여기저기 많이 옮겨다니긴 했지만,
나는 <이사>에 대한 감각은 별로 없다.
나는 밖에서 싸돌아다니다가 부모님들이 다 이사해놓은 집에 쏙 들어가 사는 식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사에 관해서라면, 여러 번 했던 얘기지만, 좀 웃긴 얘기를 할 수 밖에.
대학에서 학생회 일을 할 때 집이 거의 학교 담 밑에 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밤에 학교에서 일하다가(또는 놀다가) 학생회실이나 동아리방에서 잠깐 자고,
아침이나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후딱 씻고 나오는 생활을 했었다.
어느 날, (그날은 한 3일만에 집에 갔던 것 같다. -.-;;;) 점심시간에 집에 갔는데,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안을 둘러보는데,
'뭔가' 휑~한 느낌이었다.
'이거 드디어 우리집에도 도둑이 들었구나!'하는 생각
에 부모님께 전화를 하는데 그날따라 전화도 안되고...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으신 우리 어머님.
"아이고 우리 이사했는데
, 너한테 얘기를 안했네~ 미안~" (O.o);
; 뭐 이런 시츄에이션이었다능...
근데 난 왜 그때 휑~한 느낌이 이사짐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난 그때 그저 뭔가 썰렁하고 으스스한 느낌 때문에
도둑이 있을까 여기저기 조사를 했었는데도 말이다.
아해

이사갈 방을 찾으러 다니는 일은 고되다.
방을 고를때
이전 살 던 집에서 힘들다고 여겨지던 부분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고르게 된다.
한번은 빚을 다 갚고 나니 돈이 없어 월세 지하방에 살던 적이 있었다.
(정말 지하방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그러다보니 햇살이 잘 드는 집은 내가 집을 고르는 첫째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고른 집은 빛이 정말 잘 드는 집이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다세대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통풍이 잘 안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집은 통풍도 잘 되고, 빛도 잘 드는 곳으로 이사했다.
아, 이제는 좀 나아지겠지 했는데,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그 동네는 오래된 곳이라 하수구 냄새가 축축한 밤이면 진동을 했다. 그래 다음에는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왠걸 돈이 없어서 더 나쁜 주거환경으로 이사를 했다.

역시 돈이 있어야 하는구나. 돈 없는 사람이 구할수 있는 적절한 주거환경은
아직 사회가 보장해주고 있지 않구나라는 현실이 씁쓸하다.
많은 사람이 조금 나은 주거환경으로 이사가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너무 적다.
그저 돈에 맞춰서 갈수밖에 없다.
개인이 가진 돈에 맞춰서 선택할수 밖에 없는 현실....ㅠ,ㅠ;;

그래서 나에게 이사는 고되고 힘들다.
이사 자체가 아니라 이사를 위해 집을 고를때,
집을 돈에 맞춰 골라야할 때 느껴지는 비애감때문에 말이다.
바람소리



내 기억속에 있는 이사는 총 5회.
집팔아 빚감고 세들어 간 집에서 처음 전화기를 만났다.(내나이 6살)
-> 다시 돈모아 집사서 마당있는 집, 방 5칸 중 4개는 다 세주고 방하나에서 다섯식구가 살았다.
-> 노태우 대통령은 미아동을 개발한다며 달동네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미아길음 뉴타운으로 이어지는 재개발의 첫삽)상가를 준다는 건설사 말에 속아
집을 비우고 달동네에서 처음 평지로 내려왔다.
마당에 있던 대추나무를 찾으러 갔을 때에는 이미 누군가가 파가고 없었다.->
2004년 크리스마스 이브.
마당있던 우리집을 부수고 새운 24층 아파트 17층에 들어갔다.
옛날 대일외국어고등학교가 있던 현재의 서경대.
서울 일대가 보이는 고지대에서 사라진 나의 달동네를 기억했다.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나..
사진기로 동네를 찢어 놓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 독립해서 아파트에서 탈출.
북한산이 옆에 있고, 화계사가 15분 거리에 있는,
시원하고 조용하고 아직도 달동네 인심이 남아있는
화계사입구 2층 양옥집 1층에 세들어 3년째 살고 있다.
삼양동 달동네에서 보았던 어른들은 이곳에서 간혹 만나고
가끔 부모님만이 살고 있는 높은 아파트로 놀러간다.

다음 집은 서울이 아닌 곳. 산과 바다가 가까운 남쪽 지역 어디쯤..
간혹 여행할 때에는 살만한 곳이 있니 살피고 다닌다.
곧 시간이 흘러 서울을 떠날 때...
간편한 이사를 위해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일숙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것 중에 하나!
올해 팔자에도 없을 것 같던 이사를 '2번'이나 했다.
물론 새로운 공간을 꿈꾸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기에는 멀고 고되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씁쓸함이 현실이다.
우선! 내가 원하는 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집은 내가 아무리 바득바득 해도 모을 수 없는 가격으로 치솟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더라도
그 집이 내 '소유'가 아닌 이상 거진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녀야 한다.
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하나 더! 오래도록 살고 싶은 괜찮은 집이라도 부수고 뒤집는 지금의 개발광풍을 피할 수 없다면...
언제쯤 달콤하고 행복한 이사를 해볼 수 있을까.
부디 이번에 이사한 집에서 가능한 오래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볼 뿐...
그리고 이런 바람이 모여 언젠간 이 젠장 맞을 현실을 바꾸리라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이사한 집과 친해지러 가련다.




'이사'는 항상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사는, 국민학교 4학년 때 했던 첫 이사.
태어나서 계속 한 집에서 살다가(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때 처음으로 이사란 걸 하게 됐다.
이사하면서 설레기보다는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꽤나 진지하게 슬픈 감회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그리곤 서울로 온 이후로는 지겨울 정도로 이사를 했다.
나도 거의 1~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이벤트처럼 있는 친구들의 이사,
하숙집/자취방 옮기기.
자주 이사를 해도 이사는 너무 힘들고 지친다.
이사를 해도 어차피 그곳에서 또 이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사가 싫다. 가장 힘들었던 이사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방 사무실 이사!
명륜동에서 지금의 중림동으로 옮겨오면서 날랐던 짐들은
5톤 트럭 3대 분량이었던가?
3층, 4층 높이에서 후들거리며 사다리차에 올라 짐을 실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ㅎㄷㄷ...
다신 사무실 이사를 하고 싶지 않다!
돌진

가끔 친구들이 이사할 때 가서 도와준 적은 있지만
아직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어서
'내' 이사는 해본 적이 없다.
좀 고생스러워도 좋으니 어서 독립을 해서
내 이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

대학교 5학년(?) 때
학생회 선거에 남은 돈을 모두 내고 나니 당시 자취방 돈을 석 달 정도 못 내서
새벽에 몰래 들어가 씻고만 나오는 생활을 하다 결국 아주머니에게 들켜
어머님께 돈을 빌려 밀린 방값을 내고 2년간의 자취 생활을 접었다.
얼마 안 되는 살림이라 이사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로 네 번 나르니 나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사라지니 마음이 참 공허한 이사였다.
요새도 난 다시 '자기만의 방'을 얻으려고 한다.
내년 목표 중 하나는 다시 자기만의 방을 얻는 것...
초코파이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생애 최초로 가출을 결심했다.
집을 나서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이사를 하기 위해!
치약?수건?옷가지 등 생필품을 챙기기 시작하는데,
ㅎㅎㅎ 나에게 친숙한 배개와 이불을 두고 가야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삿짐은
작은 가방 하나에 들어갈 만큼 단출했다.
빈집운동을 하는 친구 집에서
생애 가출 첫날밤을 지내며,
두고 온 베개와 이불 생각만 났다.
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