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애매함에 대한 절망
지난 겨울 인권재단 사람이 마련한 세계인권선언 60주년 인권이야기 두 마당 행사에서 있었던 일. 나는 사랑방에서 자그마한 일(?)을 하는 관계로 이곳에 좀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어떤 장애인 남성(이하 ‘갑’)이 와서 단체 관계자들과 입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갑은 단체가 준비한 행사 유인물의 글자 크기가 너무 작다며, 자신이 볼 수 있게끔 15포인트 정도의 글자 크기로 작성된 유인물을 준비해주거나, 자신의 노트북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파일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단체의 담당자들은 갑의 부탁에 귀찮은 표정으로 일관할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갑은 한 여성 담당자의 팔을 잡아끌었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옆에 서있던 나는 갑의 행동에 놀라 갑을 역시 잡아끌었고, 갑은 흥분해 소리쳤다.
“왜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주는 거예요. 글자를 볼 수 없단 말이에요.”
난장판이 된 그 곳에, R형이 도착했다. R형은 그를 보자마자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지 마.” 갑은 응수했다. “눈이 안보이니까 유인물을 준비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건 인권침해 아니에요? R형.” R형은 말했다. “너 그렇게 인권 얘기하지 마. 기분 나빠.”
나는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R형이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엄청난 경찰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자조적일 뿐, 불쾌하거나 분노에 찬 표정을 짓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R형이 갑에게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드러낸 것이었다.
행사는 3시에 시작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갑은 30분 전에 행사장에 도착해, 관계자들과 30분간 실랑이를 벌였고, 행사시간인 3시가 시작되어 사회자가 시작멘트를 하려하자, 크게 소리쳤다. “왜 자료를 준비해주지 않는 거예요. 나한테도 자료를 준비해달라고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자료를 주고 왜 나한테는 주지 않죠. 동등하게 대해주는 게 인권 아닌가요?”
사실 이 행사에 발제문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구두로 발표하고 토론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발제문은 없다는 점을 사전에 공지해놓은 상태였다. 이 점을 관계자들이 갑에게 반복해 설명했지만, 갑은 ‘다른 이들에게 제공했는데 왜 나에겐 주지 않느냐’는 이유로 연거푸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울먹였다.
결국 ‘갑에게 맞는’ 방식으로 자료를 제공한 후에야 행사는 시작되었다. 예정시각으로부터 20분이 지난 후였다. 패널들의 발표 중간 중간 갑은 ‘타이밍이 맞지 않게’ 크게 웃었고, “왜요?”, “그래요?”라며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패널들이 발표를 끝내고 청중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 갑은 손을 들고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일상적으로 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많다. 그중에서도 장애인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무시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오늘 제가 겪은 일도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질문 드리고 싶다.”
많은 패널들이 그 점에 대해 답했고, 어떤 패널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반박했다.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각시켜 권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있다. 이 점에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관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나는 차라리 크게 소리를 내고 싶다.”
그러자 갑은 즉각 반박했다.
“이렇게 피해자, 소수자들을 몰아가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이날 행사의 주연은 패널도, 사회자도, 행사의 주제인 ‘인권’도 아닌, ‘갑’이었다. 갑은 이 날 압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완전히 관철하는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갑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게 허용된 것은 절망 밖에 없었다. 갑이 이런 행사마다 등장해서 ‘상습적’으로 ‘훼방’을 놓는 인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에 절망했고 (그는 시각장애가 없음에도 억지를 부렸다는 얘기), 이 행사를 야심차게 준비한 R형을 비롯한 단체 관계자 분들이 느꼈을 절망감에 절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메시지 자체는 유효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이 주는 복잡함에 절망했다.
나는 갑이 행사 중간 중간 도저히 (내 입장에서 볼 때) 전혀 ‘타이밍이 맞지 않는’ 박장대소를 터뜨릴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고, 갑의 ‘억지스럽다고 느껴지는’ 문제제기가 불쾌했다. 그럼에도 나의 행동과 생각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비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타자성’의 벽은, 편견과 그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 주는 행위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전막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내게는 객관적인 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벽이기도 하다. 나는 여성주의에 대해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군대를 둘러싼 쟁점들을 두고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나는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괜히 어설프게 말했다가는 그들에게 상처를 줄까봐, 그저 영원히 ‘고민해볼 문제’로 쟁여둘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들의 ‘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위선을 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주목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 날의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날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서 그 날 갑의 슬픔에 진정성이 있는지 여부를 분간할 자격이 없다. 갑의 행동을 ‘상식’의 이름으로 따지고 드는 것이 내게 주제넘은 일인지 아닌지 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나는, 이날 단체 관계자, 특히 R형의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R형과 단체의 관계자들은 이 날 행사에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의) 기대감을 갖고 준비했을 것이므로, 내가 그들의 심경을 파악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고, 그저 막연하게 절망할 뿐이다.?
절망에 그치고 마는 것은 역시 나 자신을 비롯한 무언가를 유기하는 것만 같다.(이 역시도 확실치가 않다.) 일단 그 날의 느낌을 이렇게나마 기록해두기로 한다.
둘 - 치유와 바람
관심과 상처는 동시에 온다. 적어도 지난 2008년 한 해 동안의 나에겐 그러했다. 지난 한 해 내게 가장 무서운 말은 “요즘 뭐하고 지내?” 였다. 묻는 이에게는 관심의 표현이었지만, 내겐 상처로 남았다. 묻는 이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무력해졌다. 상처에 공감해주지 않는, 그저 무턱대고 던지는 ‘관심의 표현’은 내게 지금껏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관심과 상처를 동시에 주었던 시간들, 하지만 유독 사랑방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여기에 와서 알게 된 많은 이들은, 나에게 쉽사리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묻지 않았고, 물음을 던지더라도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리고 내게 ‘왜?’를 던지지 않았다. 사랑방에서 한동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부유했지만, 나는 사랑방에게 그 점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분석학 관련 서적들을 통해서 어설프게나마 내가 내린 결론은, 상처는 그것이 상처임을 (내가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는 과정에서 치유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설정해놓은 ‘나 자신’이라는 이상형에서 벗어나,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치유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 글이 지금까지 상처로 남아있을지 모르는 그 날의 기억을 (‘관심’이라는 이름 아래) 괜스레 끄집어내는 게 아닌지 두렵고,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내내 나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그 날 그 행사가 있었던 이후 사랑방에서 그 행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는 이는 없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속내와 달리)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이 글은 예의 유쾌한 목소리로 이 글을 써도 괜찮다고 말해준 R형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쓰는 것이고, R형에게 드리고픈 글이기도 하다.
시인 도종환은 꽃은 흔들리며 핀다고 이야기했다. 사랑방이, 그리고 사랑방의 착한 이들이 새해에 닥쳐올 모진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활짝 피어나기를. 사랑방의 뿌리는 무모하게 불어올 바람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을 것이므로, 흔들리며 피어난 꽃들이 자아낼 향기는 바람의 세기만큼이나 세상에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