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만 있고 ‘인권’은 없다!
언어는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단어 선택조차 민감한 정치권에서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가가 바로 정책방향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짧은 취임사에 ‘경제’라는 말은 여덟 번이나 나오지만 ‘인권’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지상최대의 과제인 양 남발되는 ‘경제’는 정말 국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없고 ‘종말론’처럼 광범위한 공포를 유포하며 ‘경제’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세계경제대국 10위가 되어도 ‘국민의 사회적 권리’ 보장은 없다
취임사에도 밝혔듯이 수많은 노동자, 농민 등 국민들이 흘린 땀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국민소득은 2만 불로 올라갔지만 소득양극화는 심해져 근로빈곤층은 늘어났다. 경제성장이 대다수 시민의 소득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또한 가난해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와 공공성이 미흡해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사회적 권리가 보장되고 있지 않다.
시민들은 공공적 성격의 의료와 교육, 교통에 수많은 지출을 소비해야 하고 그래서 세간에는 “임금 빼고 다 올랐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올 2월말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정부예산에서 교육인적자원부 예산은 2007년 19.8%로 전년에 비해 0.3%p 감소했다. 교육공공성을 위한 재정 마련은 하지 않은 채 사교육비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교육정책을 내놓고 있다. 의료비 부담을 줄여야 할 정부가 나서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와 같은 의료의 경제적 접근성을 떨어뜨리고 의료양극화를 불러일으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국민소득 2만 불을 넘었지만 국민소득 2만 불일 때 유럽에서 실시되었던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한국에는 없다. 한국의 복지지출은 OECD의 ‘2007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GDP 대비 5.7%로 OECD 30개국 중 최하위이며, 평균치인 20.93%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회보장은 UN의 세계인권선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하 사회권 규약)에도 명시된 시민의 권리이다. 물론 복지가 사회권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복지지출 비율로 사회보장제도에 국가가 얼마나 기여하는가를 읽을 수는 있다. 아무리 새 정부가 ‘능동적, 예방적 복지’를 하겠다고 하지만 재원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복지정책은 어느 후보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복지를 사회권의 실현 과정으로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일부 층만을 대상으로 한 ‘선별적 복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복지가 모든 국민이 누려야할 보편적 권리로서 상정되지 않으면 복지정책은 예산 등을 이유로 계속 후퇴할 수 있음을 노무현 정부 시절 이미 경험했다. 또한 새로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내정자 김성이가 “현재 복지정책은 일부 수혜자들이 정부 지원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복지병’을 키울 뿐이다”라는 발언을 하고 있기에 새 정부의 복지재원확보 방식과 권리대상자 선정기준을 우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은 국민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비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처럼 국민소득 4만 불이 된다고 해도 사회권 보장은 요원할 것이다. 의료와 교육, 교통 통신 등의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는 정책으로 일관하는 한 사회권 보장은 이루어질 수 없다. 시장은 기업의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국민의 권리보장 실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기업이 헐값에 민간에 넘겨지기도 했고 이를 통해 세금이 민간기업의 이윤 확장에 쓰여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취임사에서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은 민간에 이양하겠다”며 공공기관 및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기조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이명박 정부는 “기업인이 나서서 투자하고 신바람나서 세계시장을 누비는데” 치중하기 위해 각종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권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불법투쟁’이란 낙인이 아니라 노동권 보장 계획을 세워야
새 정부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음은 단지 ‘인권’이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표에 따르면 2007년 취업자 중 임금근로자의 비중은 68.2%로 전년대비 1.0%p 증가했다. 우리 사회 대다수 국민은 임금노동자로 살아간다. 따라서 노동권의 보장은 국민의 인권 실현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는 노동권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임금조건, 노동조건, 단체행동권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은 불법투쟁을 지양”하라는 말만 되뇌이고 있다. 1990년에 UN의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자유권 규약)에 가입했지만 22조(결사의 자유와 단결권)는 아직까지도 유보조항으로 두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비롯한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파업으로 몰아넣었으며, 필수공익사업장의 기준을 확대하여 파업권을 비롯한 단체행동권을 무력화하였다.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노동3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노동3권 규제법들에 대한 전면적인 법 개정이며, 업무방해·가압류·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단체행동권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통제할 방안을 세우고 기업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침해해온 노동권을 보장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턱대고 ‘불법투쟁’ 운운하고 있다. 노동권을 보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가치지향은 없고 ‘실용’만 강조하는 허무함
취임사에서 새 정부는 ‘이념의 시대’에서 ‘실용의 시대’로 가자고 한다. “실용정신은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합리적 원리이자 시대정신”이라며 실용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용은 쓰임을 얘기하는 것일 뿐이므로 정부는 먼저 무엇을 위한 실용인가를 밝혀야 한다. 지향이 분명하지 않은 채 논의되는 ‘실용’으로는 열심히 노를 저어봤자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그 가치가 국정철학으로 내놓은 화합적 자유주의의 설명 중 ‘자아실현과 행복추구’라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져야 한다. ‘자아실현과 행복추구’가 빈부차이에 따라 불균등하게 보장되는 한국사회에서 수사로 그치지 않으려면 지향하는 가치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새 정부가 어떤 ‘가치’ 실현을 위한 실용인지를 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전체기조에서 그 가치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규제완화, 경제성장, 기업은 부국의 원천’이란 말잔치에서 결국 ‘국민의 인권향상’을 위한 실용이 아니라 ‘기업’을 위한 실용임을 맥락상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사람다운 삶을 위한 인권’의 가치이다. 경제대국 10위라는 지위에 걸맞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가치는 ‘생태, 평화, 인권’이어야 한다.
인권에 대한 협소한 인식과 일류선진국가 이데올로기
앞서 말했듯 취임사에 인권이란 말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을 말하면서 ‘시민권과 사회권’을 사용하였다. 대통령은 “여성은 시민사회와 국가발전의 당당한 주역입니다. 여성의 사회참여는 사회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양성평등 정책을 추진해서 시민권과 사회권의 확장에 힘쓰겠습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는 최소한의 인식이 있어서 ‘시민권과 사회권’을 사용하였는지 모르지만, 우려스럽다. 시민권과 사회권은 ‘모든 사람’의 기본권임을 몰라서 여성인권에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며, 여성인권만을 얘기하며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또한 여성의 시민권과 사회권 보장을 위한 방안으로 “더 많은 여성이 의사결정의 지위에 오르”는 것 외에는 아무 말이 없다.
여성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시민권, 사회권의 보장이 단지 의석수, 장관수의 확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은 세계인권운동의 역사가 말해준다. 아직도 대다수 여성들은 가정폭력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빈곤층을 채우고 있다. 비정규직과 빈곤에 대한 대책이 없는 여성인권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레즈비언, 비혼여성, 장애여성, 이주여성 등 다양한 여성소수자들의 사회권과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취임사의 맥락에서는 여성인권조차도 ‘국가발전’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 사회로서 국가가 있는 것이기에 국가는 개인의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새 정부는 상기해야 한다. 취임사에 ‘대한민국의 선진화, 선진일류국가’는 제일의 과제가 되어 여섯 번이나 오르내리며 국가주의를 유포한다. 이러한 담론구조에서 국민은 모든 ‘피와 땀’을 바쳐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현실에서 인권침해자이자 당위로는 인권이행의 의무자인 ‘국가’ 밑에 ‘인권’이 존재하는 한 인권실현은 머나먼 일임을 우리는 수십 년간의 개발독재시절을 온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다.
성공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국민성공 신화를 내세우며 당선된 새 정부는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한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시골 소년이 노점상, 고학생, 일용노동자, 샐러리맨을 두루 거쳐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이명박 대통령의 경험을 보여주며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성공신화는 ‘경쟁의 정글’로 4천만 민중을 집어넣는 것이다. 4천만 민중이 모두 대기업 회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성공하지 않아도 ‘끼니를 굶지 않아도 되고, 학비를 걱정하지 않으며, 안정적인 일자리와 사회보장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무한 경쟁의 학교와 사회에서 장시간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사라지고, 장시간 노동에 산업재해를 당하는 노동자가 줄어들 것이다. 아직도 OECD국가 중 연간 노동시간이 유일하게 2천 시간이 넘으며 정부가 줄기차게 강조한 정책방향인 노동유연성은 OECD국가 중 최고로 높지만 최저임금은 가장 낮다. 무한경쟁만을 강요할 뿐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제도는 전무한 게 한국의 현실이다.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한 말처럼 “정치의 근본은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데”에 있다면 정책방향은 국민을 경쟁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잡혀야 할 것이다. 성공한 국민만을 위한 정부, 성공하지 않은 국민은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세상은 대다수 ‘국민’을 버리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새 정부가 해야 할 정치는 성공하지 않아도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국민’은 정말 ‘살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