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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법원, "수배전단 주민번호 기재 문제없다"

수배전단에 기재된 주민등록번호가 도용되어 피해를 입은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배소송에서 법원이 경찰의 손을 들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한혁 대외협력국장과 여성오 조직부장은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집시법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됐다. 당시 경찰은 수배 이틀만에 두 사람의 △사진 △주거 △본적 △주민번호가 기재된 수배전단 3만부를 제작해 전국 경찰서와 경찰청 인터넷 홈페이지, 벽보, 전신주, 여관 등에 게시해 공개수배했다. 이후 체포 등으로 수배해제된 두 사람은 2002년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회원가입하려다 누군가 자신들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도용해 아이디(ID)를 개설한 사실을 알게 됐다. 또 누군가가 도용된 아이디로 음란물과 불법수집한 주민번호를 이메일로 배포한 사실도 발견했다.

이에 두 사람은 "주민번호는 개인의 생년월일, 성별, 지역 등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로 구성된 것"인데 "경찰이 공개수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사진·이름뿐만 아니라 주민번호까지 공개해 인격권이 침해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각각 2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제11민사부(재판장 정영진)는 "법령에 의하여 공개수배를 하더라도 (경찰은) 그 수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한도에서 원고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며 "주민등록번호를 공개한 것이…한도를 초과한 것이라면 그 공개수배는 위법하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관공서 이용, 은행거래, 병원진료, 인터넷 홈페이지 회원가입 등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주민증이나 주민번호 제시가 필요하고 △범죄자들이 주로 은닉하는 여관 등 숙박업소에서는 관행적으로 숙박부를 비치하고 주민번호를 적도록 하고 있으며 △범죄자들이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관에서는 실명 금융거래를 위해 주민번호로 실명을 확인하고 있고 △도피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비행기, 선박 등에도 검색절차에서 주민번호로 신원을 확인한다며 주민번호 공개가 "수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한도를 초과한 위법한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수사목적 달성 위해 정당"

또 재판부는 △피수배자의 얼굴이 별다른 특징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얼굴인 경우 △사진이 최근의 것이 아닌 경우 △머리모양이나 안경 착용유무가 변한 경우 등에서는 일반인이 본인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주민번호는 각 개인이 서로 다른 번호를 가지고 있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변경할 수 없어 "일반인들이…원고들을 식별한 후 수사기관에 신고함으로써 수사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공개수배의 근거가 되는 법령에는 공개수배시 공개할 수 있는 개인정보의 범위를 제한하는 아무런 규정이 없고, 공개수배에 있어 수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주민등록번호의 공개가 상당한 필요성이 있다고 보여지는 상황에서는 법률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공개수배에 있어 주민등록번호 공개의 적법여부에 대하여 선뜻 판단할 수 있는 문제로는 보이지 아니하므로…경찰의 과실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소송을 담당한 안태윤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법령에는 공개수배의 근거는 있지만 공개수배 방식에 주민번호는 없다"며 "사람들이 이마에 주민번호를 써놓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수배전단에 이름이나 나이 등 특정인을 식별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정보 말고 주민번호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보화사회에서 개인식별번호가 알려지는 것은 옛날 이마에 낙인을 찍는 형벌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재판부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는 "수배라는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공개하더라도 인권을 가장 최소한도로 제한하는 한에서 공개해야 한다"며 "누구나 보면 파악할 수 있는 신상과 인상착의만 알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수배전단을 보고 신고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주민번호가 공개되면 도용될 가능성은 더 크다"며 "공익의 증진과 개인이 입을 수 있는 피해가 균형이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번호는 신원정보와 함께 신용·재산·건강 등 개인의 모든 정보와 연결되어 있어 주민관리 수단에 그치지 않는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일기장"이라고 강조했다.

윤현식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법원의 판단은 경찰의 관행에 대해 아무런 법적 고민이나 현실의 사회문제에 대한 검토없이 인정해 준 것"이라며 "이미 도용에 따른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구제에도 신경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편 재판부는 두 사람의 수배가 해제된 뒤에도 경찰이 수배전단을 약 8∼9개월 동안 경찰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한 점에 대해서는 "도피를 계속하고 있는 공개수배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어 그 명예가 훼손되는 등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위자료로 각각 3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도용 당했으니 새 주민번호 달라"…재판부, "피해 생기면 고소하라"

재판부는 명예회복을 위해 새로운 주민번호를 부여해 달라는 원고들의 요구에 대해 "제3자가 원고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여 범죄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원고들로서는 그 제3자에 대하여 형사고소를 하거나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등 별도의 구제수단이 있"어 "신규 주민등록번호의 부여를 명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소송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 대외협력국장은 "주민번호 도용을 알게 된 후 매달 돈을 내면서 실명확인 차단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데 요즘도 내 주민번호로 각종 포털사이트에 가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어 연락이 온다"며 "인터넷에 뿌려져 있는 번호를 회수할 수도 없고,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주민번호 도용으로 인한 피해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또 "어떤 사이트에 가입하려면 일일이 신분증을 팩스로 보내 본인확인을 해야 하니까 정보화사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재판부는 주민번호가 어떤 식으로 이용되는지 파악을 못하고 너무 손쉽게 판결했다"며 "고유 인식번호인 주민번호가 공개되면서 불이익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으면 그 사람의 법적인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그 가능성을 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2003년 경찰청의 <'수배전단 주민번호 게재' 관련 대책> 문건에 따르면 경찰은 이 문제에 대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나…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는 시위자 수배전단에도 일반 형사수배자들과 같이 주민번호 대신 생년월일만 기재, 피의자를 특정토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대외협력국장은 "이른바 공안사범에 대한 정치적 보복행위였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며 "경찰 스스로도 문제가 있어서 안하기로 한 것을, 법원이 수사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항소 의지를 밝혔다.


"주민번호 조합·발급 체계 바꿔야"

이 사건처럼 주민번호 유출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경우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현행 주민등록법은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자기 또는 다른 사람의 재물이나 재산상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 사용한 자'만을 처벌하고 있어 정신적 피해를 입힌 경우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8월 정부는 '정신적 피해를 입힌 자'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국회 행정자치위(아래 행자위)에 제출했고, 이 법안은 12월 행자위를 통과했다.

윤 정책연구원은 "(법안의 취지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가해자인 국가가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해 원상회복 이상의 배상을 해야 할 것"이라며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면 주민번호의 조합체계와 발급체계를 바꾸고, 최소한 민간에서는 신원확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