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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죠’

기수 님을 만났어요

윤석열이 이어준… 아니 아니, 윤석열 퇴진을 바라는 마음이 이어준 새로운 인연, 한 달 전 사랑방 후원인이 된 기수 님을 만났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나면 차별금지법을 지지했던 뮤지션들을 모아 축하 공연을 하는 게 꿈인 저는, 그 공연에 ‘브로콜리 너마저’를 섭외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기수 님을 꼭 초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윤석열 퇴진이 끝이 아니기에,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마다 발걸음을 내딛어 온 기수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사람들이 자동차를 덜 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자동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고요. 여러 가지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고 있는 ‘기수’입니다.

 


▲동네 이웃 강아지 겨울(위), 매실(아래)과 함께 (사진: 김도연, 겨울과 매실의 보호자)

 

공대생이시군요! 자동차 연구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자동차의 공기 저항을 줄이는 일을 하는데요. 자동차의 디자인 과정부터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자동차가 받는 공기 저항을 줄여서 연비를 더 좋게 만들거나, 전기차의 경우에는 같은 배터리 용량으로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의 에너지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자동차 연구가 업인데, 자동차를 덜 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장 먼저 말씀해주시네요.

학생 때 독일로 교환학생을 갔었는데요, 대중교통이 굉장히 잘되어 있고 여러 교통시설이 연계가 잘 되어 있었어요. 코로나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외출하기 어려우니까 자동차 대신 자전거 도로를 많이 확충한 국가들도 있구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정책적인 노력이 거의 없으니까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하고, 사람들은 계속 자동차를 사고… 이런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후위기에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아요. 사랑방이 공공교통 확충 요구하는 기후정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웃음)

당연히 기후에도 관심이 많아요. 중학생 때 <과학동아>에서 종이컵 하나의 탄소발자국이 12그램이라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 내용을 인쇄해서 교사 식당에 붙여 놓았던 기억도 나네요. 저는 아직도 자동차가 없는데요, 일터에서도 왜 아직도 차를 안 사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저도 언젠가는 차를 살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냥 조금 더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니면 되는 상황이라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자가용 없이 지내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자동차를 덜 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좀 놀라거나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자동차를 연구하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모순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최근에 화력발전소 노동자분들이 하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산업 전환의 결과가 노동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정의로운’ 방식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2017년도에 국회에서 기후변화를 다룬 프랑스 다큐멘터리 <내일>을 상영한 적이 있거든요. 그 다큐에서 70kg의 사람 한 명이 움직이기 위해서 1.5톤의 차가 움직이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이라는 대사가 있었어요.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고, 자동차를 덜 탈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와 기수님이 처음 만난 게 한 달 전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에서 열었던 시민공론장이었죠. 기수 님은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어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 집회에 계속 나갔는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집회마다 시민발언이 계속 이어졌는데, 그동안 잘 접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직접 많이 들을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내는 장이 열린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신청을 하고 참여하게 됐어요.

 

매번 꼬박꼬박 집회에 나가는 이유가 있을까요?

비상계엄이 터진 날이 12월 3일 화요일이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너무 피곤한 날이어서 일찍 잠들었어요. 밤 10시에 잠들었다가 아침 6시 반쯤에 일어났어요. (같이 웃음)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편하게 잤다가 일어난 거죠.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돼서 급하게 트위터 켜서 보고. 비상계엄이 선포됐던 날 별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국회 앞에 달려갔던 분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구나, 약간 뭔가 빚을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상계엄 직후에 바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제가 국회로 달려갈 만큼 용기가 있었을지 잘 모르겠고…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보탤 수 있는 건 보태자는 마음으로 집회에 나간 것 같아요.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을 앞두고 있는데, 요즘은 어떤 마음이신가요?

빨리 파면 결정이 내려지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이제는 아예 극우가 되어버린 세력이 또 다시 집권을 하게 될까봐 좀 불안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국회 청문회부터 헌법재판소 변론도 계속 챙겨봤는데, 파면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또 지난 대선처럼 파면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2024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모습 (노란색 가방)

 

2016~7년에도 집회에 나가셨군요. 2017년 박근혜와 2025년 윤석열 퇴진 집회에 다 계셨는데,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은 어떠세요?

 2017년 당시에도 집회에 나갔었죠. 그런데 집중집회가 열리던 날이 회사의 최종 면접 즈음이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웃음) 박근혜 퇴진 촛불 당시에는 차별이나 여성 혐오 등에 대해서 지금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지난 12월 7일 여의도 집회에서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무대 위에서 페미니즘 관련 발언을 했을 때 아유 소리가 있기도 했잖아요. ‘이번에도 이런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하는 패배감 같은 게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비상행동이 구성되고 평등수칙 같은 게 만들어지고 이전과 다르게 변화하는 걸 보면서 ‘아, 그래도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평소 칭찬이라며 차별적인 말이나 무례한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물론 지금도 ‘탄핵을 위해서 모였는데 왜 다른 이야기 하냐’는 분위기도 여전히 있지만요. 지난 2월 8일 범시민대행진 무대에서 히시야마 나오코 님이 발언한 것을 두고도 ‘왜 일본인을 무대에 세우냐’ 면서 사람들이 비상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 분의 발언을 듣기 전까지는 2.8 독립선언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고, 너무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윤석열이 파면이 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되는구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퇴진 집회에 청년 남성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우려도 적지 않고, 윤석열은 나라의 희망을 봤다며 ‘청년’을 계속 호명하고 있잖아요. 기수님도 이른바 ‘2030 남성 청년’에 속하는데, 답답한 마음이 드실 것 같아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행사나 모임에 참여하다보면 대다수는 여성이고 저만 남성인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이 재밌는 일에 왜 다른 남성들은 관심이 없을까 궁금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제 또래 남성들은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는데 당사자들과 직접 대화를 해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다니는 일터의 구성원 95%가 남성인데 지금은 제가 중간 정도의 직급이라 위계가 있을 수 에 없어 그들의 본심까지는 알기 어렵기도 하고요. 사실 2030 남성 청년뿐 아니라 존경할만한 남성 자체도 드물다고 느끼기도 하는데요. 그에 반해 제가 평소 만나는 친구들의 대다수는 여성이에요. 어쨌든 저는 동료시민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감각들이 팽배해진 것 같아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웃음)

 

활동가인 제 고민과 비슷하네요. 학생 때 운동권은 아니었나요?!

저 스스로도 좀 의문인데요 (웃음) 학생운동은 안 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생운동이 거의 사라진 시기이기도 했고 비수도권 지역에서 학교를 다녀서 확장될 기회가 부족하기도 했어요. 다만 제가 다닌 학교에서도 총장과 이사회의 불합리한 구조가 있어서 본관에서 시위를 하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앞 기자회견에 참여하기도 했을 만큼 무관심하게 살았던 건 아닌데, 이것도 조직에 소속되어 앞장서기보다는 개인으로 참여 했었고요.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저는 트위터를 통해서 제가 몰랐던 세계들을 많이 알아갔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2010년대 초반에 트워터를 통해서 페미니즘을 접했을 때는 ‘왜 이렇게 과격하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언제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그 계기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교환학생을 갔을 때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깰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있고요. 또 하나는 제가 군대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늦게 갔는데 군대 전역했던 날이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날이었어요. 군대 생활을 카투사로 미군과 함께 하면서 여성 군인 동료는 물론 성소수자 동료들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이해하게 되기도 했고요. ‘닷페이스’가 문을 닫기 전까지 계속 ‘닷페피플’이라는 회원으로 있었는데 닷페이스를 통해서 접했던 이야기들 덕분에 많이 바뀌었고 가까이 연결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김지은 씨가 안희정의 위력 성폭력 사실을 밝힌 미투가 2018년 3월 5일에 있었잖아요. 부끄럽게도 저는 처음에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져서 당황스러운 마음만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안희정과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또 분노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건 완전히 잘못 됐구나 깨달았던 것도 영향이 컸어요. 안희정 사건도 서부지법에서 맡았는데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서부지법 앞에서 집회를 했었잖아요. 그 날 집회는 못 갔지만 그냥 퇴근하고 서부지법에 갔어요. 그게 8월 14일이었던 것 같아요. (놀라운 기억력) 그 날 제가 일터에서 동료에게 서부지법에 가보려 한다고 했더니 자기는 생각이 다르다고 2차 가해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그때 크게 느꼈고, 그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과도 서서히 멀어졌죠. 그럼에도 과거의 저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 많은데, 지금 이 순간에도 몰랐던 것들을 새로 알아가는 중인 것 같아요.

 

시민공론장에서 기수님이 기업 내 성차별적인 관행과 조직문화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해주셨을 때 ‘저 분은 남성 페미니스트구나, 남초 직장이라니 힘드시겠다’ 생각했던 게 떠오르네요. 신입 시절에 비하면 직장 생활은 어떤가요?

사실 제가 이 일터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친한 친구들은 제가 1~2년도 못 버티고 퇴사할 거라고 생각했었고 저도 걱정이 많았어요.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 있지만 안에서도 나름대로 제 위치에서 싸우고 있기도 하고, 엄청 스트레스 받는 일은 예전보다는 줄어든 것 같아요. 물론 일을 너무 과하게 해서 번아웃이 오기도 하지만요. 사실 이런 환경에 계속 있으니까 아쉽기도 하고 싫을 때도 있죠. 그래서 제가 회사 밖에서 열리는 저와 결이 맞는 행사나 집회, 모임에 찾아다니면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계속 있는 것 같아요.

 

지난 주말 광장에서도 마주쳤잖아요. 혼자 계신 것 같았는데, 집회나 행사에는 보통 혼자 다니세요?

혼자 다니는 경우도 많지만 최근의 집회는 동물권행동 카라 노동조합 분들과 자주 갔어요 3년 전에 다른 분이 유기동물 구조한 걸 도우면서 동물권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원래 카라의 후원회원이 아니었는데 작년에 카라 노조 투쟁 소식을 듣고 좀 더 잘 싸우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회원이 됐어요. 시민단체에서 대표와 이사회가 전횡하면 견제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하더라고요 카라 노조 외에도 세종호텔과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도 계속 마음이 쓰이고요.

  


▲2024년 7월, 서울시 마포구 동물권행동 카라 앞에서 카라 노조와 함께한 점심 시간 선전전 (사진: 카라 노조)

 

저희가 한 달 전 시민공론장에서 만난 직후에 사랑방 후원을 시작하셨죠. 사랑방을 후원해야 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너무 드문 일이라…)

제가 시민공론장에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 후드티를 입고 갔는데 그걸 보고 몽 님께서 ‘저도 브로콜리 너마저 좋아해요’라고 말씀해주셔서, 또 이름도 쉬워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집에 가서 트위터를 하는데 어떤 행사 홍보물에서 이름을 봤어요 시민공론장에서 같은 페미니즘 모둠에 있던 한국성폭력상담소 오매 님과 몽 님 이름이 다 있었던 거예요. (혹시 2025 체제전환운동포럼 홍보물인가요?!) 맞아요. 부끄럽지만 사실 그때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단체 이름을 처음 알게 됐어요. 제가 그날 몽님을 뵙지 않았다면 단체의 이름을 보고도 잘 못 들어본 곳이라며 지나쳤을 것 같은데, 직접 만난 사람이면 더 관심이 가게 되잖아요. 좀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활동가들의 살림살이에 조금은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하거든요. 찾아보니 사랑방이 만들어진 지 30년이 넘었고 오랜시간 앞에서 싸워주셨다는 걸 알게 되어 후원을 해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그 날 한국성폭력상담소도 같이 후원을 시작했네요.

 

아니, 너무 훌륭하신 거 아닙니까. 정말 감사해요. 사랑방이 여러 활동을 가열차게 하지만 단체나 단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잘 알리지는 못해서… 후원 소식을 듣고 너무 너무 기뻤어요.

후원인 가입하고 나서 직후에 사랑방 총회가 있다며 안건도 메일로 보내주셨길래 다 읽어봤어요. 거기에 SNS도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후원인 의견도 있더라구요. 시민단체 하면 ‘참여연대’ 같은 단체 이름은 많이 들어보게 되는데, 사실 저도 처음에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해봤거든요. 그런데 사랑방 계정이 없고 (작아지는 몽) 트워터 계정도 없는 것 같더라구요. (더욱 작아지는 몽) 당황스럽기는 했어요. 페이스북은 거의 안하니까. 그래서 홈페이지 들어가서 봤어요.

 

그런 사랑방에 먼저 찾아와 후원해주셔서 더욱 감동… 제가 기수님에게 ‘브로콜리 너마저’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길 잘했네요. 오늘도 인터뷰 후에 공연 보러 가신다고 했는데, 음악 공연 좋아하시나 봐요.

네, 웬만하면 ‘브로콜리 너마저’ 공연은 꼭 보러 가요. 2010년대 초반부터 어쩌다 음악을 들은 이후에 제일 좋아하는 밴드가 됐어요. 사실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 첫 표결했던 12월 7일에는 장기하 님의 공연이 있었는데 5시에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표결이 5시로 예정되어 있다가 조금씩 계속 미뤄졌잖아요. 그래서 트위터 어느 뉴스 계정의 알람을 켜놓고 공연 내내 계속 결과를 보고 그랬죠. 공연 마치고 나서 다시 여의도 집회로 넘어갔고요.

 

후원인이 되신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사랑방 활동 중에 눈길이 가는 게 있다면?

하고 있는 일이 워낙 많으셔서 저도 다 동의하는 내용들이어서… (곰곰히 고민) 후원인 가입하고 나서 사랑방 30주년 기념 신문을 보내주셨는데요. 손희정 님께서 “참 이상한 곳이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 자리에 사랑방이 있었습니다.”라고 써주신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몰랐던 시기에도 많은 분들이 싸우고 있었구나 싶었고요.

 

윤석열 파면 이후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기대가 있는지 궁금해요.

당장 큰 기대는 없어요. 그냥 그동안 싸워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되지 않을까…. 사실 차별금지법도 제정되고 나면 거기에 발맞춰서 사람들도, 사회도 변하게 될 텐데 정치권이 계속 방치만 하고 있는 것도 화가 나기도 해요. 비상계엄 이후에 나온 금속노조 입장도, 고공농성 하고 있는 옵티칼 노동자분들도,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도 ‘비상계엄 이전부터 비상계엄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겠죠.

 

마지막으로 사랑방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해주세요.

앞으로도 고생하실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도 잘 돌보면서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많이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