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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13) 학력 차별과 학벌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우리 사회 3대 조직

우스갯소리 하나. 우리 사회의 3대 집단이 있다고 한다. ○○대 전우회, ○○도 향우회, K대 교우회. 군대와 지역과 대학이다. 그 집단에서는 “너 몇 기야?” 한 마디로 바로 꼬리를 내리고, 그 지역에서는 ‘DJ 선생님 말씀’ 한 마디로 득표율이 90%를 넘고, 그 대학 동문회에서는 ‘학번이 곧 깡패’라는 이야기다. 패거리 문화 속에서 이성은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 그 대학보다 상위 대학이라 누구나 인정하는 대학 출신들은 내놓고 동문회로 모이는 일이 없단다. 왜? 굳이 뭉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학연’이 아니다. 학벌이 곧 권력이다.

학력 학벌 차별의 실태

차별금지법안에서 학력 학벌 항목이 빠졌단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학력 학벌 차별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미 학벌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재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학벌 구조에서는 최종 학력에 따라 그리고 동일 학력이라 할지라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사회적 차별이 구조화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80%에 이른다. 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현상으로 보통 유럽 선진국의 대학진학률은 40~60% 선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학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중졸, 고졸의 학력으로는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사람대접 받기 어렵기 때문인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전문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계(실업계) 고등학생 역시 대부분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또한 동일 학력이라 하더라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공직자 임용이나 취업, 임금, 승진 등에 있어 사회적 차별이 확고히 정착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도에는 69명의 장차관급 고위공직자 가운데 서울대 출신이 43명으로 62.3%, 1급 고위공직자 가운데 48.2%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이는 재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100대 기업 대표이사 43.7%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최근 직장인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을 묻는 설문에 ‘학벌’이라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이 22.4%를 차지해, 외모(21.9%)나 경제적 뒷받침(19.8%), 대인관계 능력(12.4%)이라 답한 응답자의 비율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학벌이라는 귀속관계는 한번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는 영구적 관계이다. 한 번 결정된 학벌이 평생 한 인간의 부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의 의식을 좀먹고 모든 개인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인들의 학력 학벌 위조 사태는 이러한 학벌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큐레이터 신정아, 연극인 윤석화. 아무도 그들의 전문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미술계, 연극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혹은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학벌이 필요하다.

사회 저명인사나 인기 연예인만이 아니다. 영화 <타짜>에서 도박판 설계자 정 마담(김혜수)도 경찰서 유치장에 갇힐 때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 내뱉으며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고 애쓴다. 큐레이터에게도 연극배우에게도 도박판 마담에게도 학벌은 일종의 ‘자격기준’이다.

몇년 전 연세대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

▲ 몇년 전 연세대 근처에 내걸린 현수막



학벌의식이 낳은 비극

학벌은 김상봉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의 동일성을 지양하지 않고 단순히 확장하려는 의지가 만들어 낸 유사가족’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학벌의식이란 개인이 학벌집단 속에서 자기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양도함으로써 정립된다. 이처럼 개별적 주체가 자기의 주체성을 양도하고 집합적 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하는 것이야말로 학벌의식의 비극이다. 연대생과 고대생이 왜 그토록 연고전 혹은 고연전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는지 생각해 보면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소위 학벌이 높은 사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벌로 인해 누구보다 많은 피해를 본 사람들도 만약 명문대 출신이 학벌 타파를 주장하면 “당신은 그 학교를 나왔으니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고, 소위 비명문대 출신이 학벌 타파를 주장하면 “당신은 명문대를 나오지 못한 콤플렉스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듯, 학벌주의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학벌구조가 존재하는 한 타자에 대한 상상력과 연대의식은 애당초 성립하기 어렵다. 과거 귀족들의 품위 유지를 위해 존재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자신의 학벌을 획득하기 위해 기울인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 보라. 어렸을 때부터 천문학적 사교육비로 철저히 무장하여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학벌을 취득한 이에게, 그 시간과 비용은 일종의 ‘투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은 그 투자에 대한 보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 대신 ‘삼성 비자금을 관리하는 변호사’가 우리 사회의 주류일 수밖에 없다.

반면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처우를 ‘자신이 노력하지 못한’ 결과로 인식하여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학벌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 특권 의식과 과도한 우월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그들에 대해 정당한 요구와 견제 의식을 갖지 못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88만원 받으며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 대신 ‘국가경쟁력 강화’를 고민하는 현실이 생기는 것이다.

지난 11월 24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 공동행동의 날' 행사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지난 11월 24일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 공동행동의 날' 행사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학력 학벌 차별 금지를 위한 사회적 조치, 그리고 대학평준화

따라서 학벌 구조는 단지 ‘학벌을 중시하는 의식의 개혁’으로는 결코 타파될 수 없다. 그러한 의식을 형성하게 된 토대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학력 학벌의 ‘차이’로 인한 ‘차별’을 적극적으로 시정하는 조치가 필요하고 나아가 학벌이 발생하게 되는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현재 정부에서 마련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에 ‘학력’ 조항을 넣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악되기 이전의 조항을 보면 가시적인 차별을 금지한다는 선언적인 조항만 있지 정작 구체적인 시정 조치,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조치는 턱없이 미흡하다.

따라서 취업, 임금, 승진 등에서 학력 학벌에 따른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금지하는 구체적인 조항이 필요하다. 구조화된 차별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전체 공직자 비율 가운데 특정 대학이나 지역 출신의 비율을 제한하는 ‘공직자 할당제’ 시행, 공무원 공채 시험이나 대기업 입사 시험에서 서울 이외 지역 출신자의 채용 비율을 적정 비율 이상으로 할당하는 ‘지방 출신 채용 목표제’ 시행 등 보다 적극적인 형태의 조치가 시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아울러 ‘학력 학벌 차별 금지를 위한 사회적 조치’라 일컬을 수 있다.

나아가 학벌을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토대인 대학서열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타파해야 한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서열체제가 존재하는 한 가혹한 입시경쟁도, 천문학적 사교육 부담도, 그리고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학벌도 사라질 수 없다.

대학서열체제 타파는 곧 ‘대학평준화’를 의미한다. 대학평준화란 모든 대학의 교육여건을 균등하게 발전시키는 것, 원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것, 그리고 공동으로 학점을 이수하고 동일한 학위를 수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학평준화 체제는 ‘대학입학자격고사 실시’, ‘통합전형, 통합이수, 통합학위’를 근간으로 한다.

대학입학자격고사는 말 그대로 대학에 입학할 자격 여부만 판별하는 시험으로 전국의 모든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현행 입시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대학입학자격고사를 도입함으로써 전국의 모든 수험생이 무한경쟁에 뛰어드는 현상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초중등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 대학입학자격고사는 성적을 산출하지 않고 합격과 불합격 여부만을 판별한다. 합격과 불합격 여부의 판별은 절대평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 예컨대 100점 만점 가운데 70점 이상을 받은 학생이면 누구나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통합전형이란 전국의 대학을 계열별로 하나로 묶어서 공동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입생 선발 과정을 통해 대학 사이에 서열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대학입학자격고사를 통과한 학생이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학 및 계열 내 학과에 지원할 수 있다. 대학 입학 정원을 최대한 확충해 지원자를 모두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개별 대학 사이의 학점 교류 및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춘 학생에 대한 전학 및 전과를 최대한 허용하여 유연하고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보장한다. 또한 모든 졸업생에게 동일한 학위를 수여한다. 졸업장에는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가를 표기하지 않고 전공 및 성적만 표기하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벌에 따른 차별을 예방하도록 한다. 대신 졸업자격기준을 지금보다 엄격히 함으로써 학생들이 더욱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벌이 아닌 능력과 소양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도록 한다.

대학평준화, 그리고 학벌 없는 사회는 가능한 현실이다. 다만 우리가 꿈꿔 보지 않았을 따름이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따름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덧붙임

◎ 이형빈 님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정책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