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고 전용철·홍덕표 농민 죽음의 원인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휘선상에 선 서울청장 등에 대해 경고를 권고했을 뿐 정작 최종책임을 진 경찰청장에 대해서는 침묵해 기대에 못 미치는 권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6일 인권위는 지난달 15일 농민대회에 참석했다 경찰폭력에 희생된 두 농민의 사망이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다며 경찰청장에게 △서울지방경찰청장·서울지방경찰청차장·경비부장을 경고하고 △서울청 기동단장을 징계하며 △각 격대장·중대장 등 지휘책임자 및 실제 가혹행위를 행한 부대원들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조사후 불법행위 정도에 따라 징계할 것 등을 권고했다. 또 인권위는 해당 부대를 특정해 검찰에 수사의뢰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나 어느 부대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인권위 조사결과 전용철 씨는 농민대회 당일 오후 6시17분경 여의도공원 국기게양대에서 국회 방향으로 약 15미터 떨어진 지점에 서 있었다. 이때 매점 앞 부근에서 정렬하고 있던 기동대가 매점 앞쪽에서 무대 뒤 1문 쪽으로 뛰면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진행방향에 서 있던 전 씨가 떠밀려 뒤로 넘어져 후두정부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또 인권위는 홍덕표 씨가 같은날 오후 5시경 여의도 포스코 공사장 부근 도로에서 6문으로 진입해온 경찰을 피해 달아나던 중 미처 피하지 못하고 6문 화단 자전거도로 부근에서 경찰의 방패에 뒷목 등을 가격당해 경추손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경찰, 방패·진압봉 등 장비사용규정 위반"
인권위는 불법집회라 하더라도 강제해산시 최소한의 물리력을 사용해야 하고 '경찰장비관리규칙' 등에 따라 △방패의 경우 방패날을 세우거나(비스듬하게 드는 행위) 위에서 내리찍는 행위를 일체 금하고 있고 △방패로 밀어내는 경우에도 몸통부위를 대상으로 하고 머리 등 중요부위를 찍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며 △진압봉의 경우에도 머리·얼굴 등을 직접 가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하퇴부를 가격하여 제압하도록 하며 △노약자나 어린이 보호에 유의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인권위는 사건 당일 현장을 촬영한 언론사 영상자료와 피해자 진술을 분석한 결과 △진압대원들이 방패를 옆으로 휘두르거나 방패를 들어올려 수평으로 세워서 시위대를 가격하는 등 방패를 공격용으로 사용한 사례가 자주 나타났고 △특히 목 이상의 안면부나 뒷머리를 가격당한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사실이 인정되며 △단순가담자나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거나 쓰러진 사람들에 대해 발길질을 하거나 방패와 곤봉을 이용해 공격하는 사례도 있었고 △여의도공원 안 본무대 앞에서 임시 응급처치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방패로 가격했다고 밝혔다.
"해산명령 없이 강제해산 돌입"
인권위가 입수한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집회시위 현장 인권보호 강조 지시사항'인 '해산검거시 안전수칙 적법절차 준수'에 따르면 △해산대상 집회라 하더라도 주최자에게 종결선언 요청을 하고 △자진해산 요청을 하고 이를 듣지 아니할 경우 3회 이상 해산명령을 내린 후에야 직접해산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해산·검거시 안전사고가 우려될 경우 강제해산을 자제하고 철저한 채증으로 사후 사법조치를 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당일 기동단장은 오후 6시 이후 여의도공원에 집결해 있는 시위대에 대해 △해산절차를 이행하지 않고 시위대 검거 목적으로 경찰력을 투입했으며 △경찰력을 6문 쪽에 횡으로 집결시킨 후 일제히 밀고 나가면서 단순가담자·노약자 구별없이 무조건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해 체포원칙에 따른 체포가 사실상 어려웠고 △이에 따라 물리력 행사의 수위조절도 어려워 사고발생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인권위는 지적했다.
사퇴 압력받던 경찰청장, 기사회생하나?
그동안 정부는 인권위 조사결과에 따라 책임자 문책 수위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일 이해찬 국무총리는 죽음의 진상과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조사결과에 따라 불법 행위자는 물론 과잉 행위자에 대하여도 엄중한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같은날 노무현 대통령도 "매우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번 일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혀야 하며, 또한 규명된 원인과 밝혀진 책임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며 인권위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적극적인 조치를 미룬 바 있다. 14일 경찰청은 "경찰 자체수사 결과는 물론 관계기관의 조사결과에 따라 불법사실이 확인된 행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현장지휘자였던 이종우 서울경찰청 1기동단장을 직위해제했을 뿐 더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인권위 권고를 계기로 정부차원의 후속조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인권위가 경찰청장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그동안 사퇴 압력을 받아왔던 경찰청장이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건조사를 담당한 심상돈 인권침해조사1과장은 전화통화를 통해 "경찰청장의 책임을 묻는다면 정치적·도덕적 책임 정도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할 책임을 진 서울청장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청장 등에 대한 경고도 인사 불이익을 수반하는 실질적인 처벌과는 거리가 멀 전망이다. 그동안 인권위는 경찰관이 가해자로 드러난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종종 '경고' 권고를 내면서 징계수위는 경찰내부에 맡겨 결국 가해경찰이 구두 경고를 받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했다. 심 과장은 "경고의 종류에는 직을 바꾸는 것까지 포함해서 여러가지가 있다"면서도 "(징계 수위는) 경찰의 자체 판단에 맡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인권위가 가해 부대를 특정해 검찰에 수사의뢰하기는 했지만 검찰이 가해 부대원을 특정해서 기소할 수 있을지도 두고봐야 할 일이다.
"이제 정부가 대답해야 할 때"
'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 고 홍덕표 농민살해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 박웅두 대변인은 "인권위에서 과잉진압에 의한 타살로 인정한 점은 환영하지만 경찰청장을 제외하고 경고 권고한 것은 솜방망이 처벌로 유감스럽다"며 "이제 정부가 이 문제를 받아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관련자를 징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타살에 대한 대통령의 공개사과 △진실을 은폐·왜곡하려 한 경찰청장에 대한 파면 △지휘라인에 있던 책임자의 형사처벌 △매번 폭력진압을 자행했던 기동단 해체 등을 요구했다. 박 대변인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가 농업문제로 발생했기 때문에 정부와 농민, 국회가 모여 농업의 근본적 회생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 발표에 요구사항이 반영되지 않으면 30일로 예정된 4차 범국민대회를 포함해 촛불집회를 지속하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장례식도 유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권위는 지난달 29일 전농이 제출한 진정사건을 같은날 인권침해조사1과에 배당하고 3명의 조사관으로 팀을 구성해 조사를 시작했다. 이어 18일 홍 씨까지 사망하자 10명으로 구성된 조사팀을 꾸려 지난 23일까지 △서면진술요구 등 관련 기록 조사 △진압기동대 실지 조사 △목격자 등 참고인 조사 △각 방송사 취재자료 입수 및 사실조회 등 조사작업을 벌였다. 19일에는 투입됐던 9개 진압중대원들을 대상으로 여의도공원 현장에서 현장조사와 검증을 실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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